장미경 : 모래 한 알갱이 속의 세상

모래 한 알갱이 속의 세상

장미경 (융학파분석가, 남서울대학교)

M.K. Jang, Jungian Analyst

jangmiky@hotmail.com

모래 한 알갱이 속에서 세상을 보고 한 떨기 야생화 속에서 천국을 본다. 당신의 손 안에 무한함을 쥐며 순간 속에서 영원을 잡는다. William Blake

공항에 도착해서 본 카트만두는 흔들림으로 틀어진 건물투성이였다. 지진 전에 건물들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면서 박타푸르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인상적으로 본 것은 사원에 들어가 신께 기도하기 위해 사원 앞에 길게 줄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기도할지 알 것 같다는 생각과 모르겠다는 생각을 번갈아 하며 그곳을 지나쳐 갔다. 숙소가 있는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에서 자동차로 1시간쯤 떨어진 곳으로 네왈족이 주로 사는 오래된 도시였다. 그곳에 있 는오래된유적지인 더르바르광장의무너진탑과유적들은구글이보여주는사진속의지진이 전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무너진 탑의 계단에 사람들과 한가롭게 늘어져 있는 개들이 올라가 앉 아 있는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

강력한 지진을 겪어본 적이 없는 나는 지진과 같은 자연재난은 인간에게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 다. 그런데 네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보다 더 한가롭고 평화로워보였다. 지진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이 상처 입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들을 돕겠다는 유치한 마음으로 그곳에 갔었다. 그들이 만든 모래장면을 보면서 지진은 어디에 있지라고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왜 그렇게 평화롭고 질서정연하며 신은 왜 그리 모든 사람들의 상자에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이냐 고도 물었다. 이 사람들은 감정을 느낄 줄도 표현할 줄도 모르는 어딘가 미흡한 사람들인가라고까 지 생각했다.

신은 그들에게 일부러 이러한 불행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의 모래상자에는 튼튼하고 안전한 집, 갈등 없고 평화로운 가족, 평화로운 자연, 이 모든 것과 관련된 신 그리고 신과 인간 의 관계가 주로 표현되었다. 신이 원망스럽지 않으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대답대신 의아한 눈빛과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신이 이 모든 것을 견디게 할 힘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네마다, 어귀마다 있는 사원에 찾아가 늘 그랬던 것처럼 신께 기도했다. 그들의 신은 창조와 파 괴의 신이었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신이었다.

그들에게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모습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하교하기 위해 작은 학교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십 명의 아이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모습이었 다. 여러 날 그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싸우고 우는 아이들이 없었다. 아이들은 상대방 아이를 그냥 받아들였다.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 아이들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었다. 저 아이들은 왜 싸우지 않느냐고 누군가에게 물 었을 때 그도 별 대답이 없었다. 그냥 그런 것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왜 지진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섯 살 스미리카는 모래에 손을 넣어 모래로 충돌하기를 반복하더니 히말라야 산을 만들었다고 했다. 사 람들이 히말라야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고 했다. 신을 향해 올라간 것일까 지진을 피해 올라간 것일 까. 네팔은 두 개의 대륙판 즉 유라시아판과 인도판 사이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나라인데 이번 지 진은 이 두 대륙판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히말라야산맥도 역시 두 대륙판이 오래전 부터 충돌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다섯 살 밖에 안 된 어린 아동이 지진이 어떻게 발생했는 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모든 아기들이 위를 향해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Himalaya는 고대 산스크 리트어로서 ‘눈(snow)의 거처’라는 뜻을 갖고 있다. 높은 산은 신이 거처하는 곳이다. 힌두교 신 화에 의하면, 시바신의 배우자 우마(시바신의 첫 번째 배우자인 사티와 두 번째 배우자인 파르바 티의 다른 이름)는 Himalaya의 처녀라고 불린다. 따라서 히말라야는 mother archetype 그리고 Self archetype의 상징이다.

이 모래장면은 마치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산 봉우리에 걸쳐져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던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은 방주 안에서 신의 뜻을 따라 어린 아기처럼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을 것이 다. 지진이라는 원형적인 사건 앞에서 아동은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느낀 것 같다. 계통발생적 관점에서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거대한 자연을 신으로 여기는 관점 을 갖고 있다. 이 아동이 히말라야 산처럼 높은 산을 만든 이유는 높은 곳에는 신이 산다는 그들 의 신념과도 관련 있지만, 성인들이 구체적인 신의 이미지 피겨로 신성을 표현한 것과 달리 아동 이 산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거대한 산은 신이며 자연신적 가치 그리고 분석심리학적으로 볼 때 불안한 자아와 근원의 상징인 자기(Self) 또는 모성원형의 연결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 다. 또한 신을 구체적 형상과 아직 연결하지 못하는 발달단계적 특성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이러 한 발달단계적 특성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신적 특성과 인간을 구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덜 발 달한 단계이기 때문에 아기는 신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발달심리학의 이론에 따르면, 아동들의 첫 번째 종교경험 발달단계는 3-6세 사이의 단 계이며 이 단계는 Fairytale 단계로서 신은 거대한 산과 같은 곳에 존재하는 상상속의 존재로 여 겨진다. 스미리카 모래사진은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리는 경험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자아가 무의식적 자료에 압도당하는 것으로, 이를 보호하려는 psyche의 시도로서 산으로 상징화 된 Self archetype의 에너지와의 연결이 다시 필요함을 의미하며 아기 자체가 그러한 에너지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을 겪지 않는 생명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생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 는 생명을 신은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융은 아마도 고통을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오늘 까지 내게 있어 신은 나의 의지에 거칠고 부주의하게 반하는 모든 것, 나의 주관, 계획, 의지, 의 도를 뒤집어엎고 더 좋거나 나쁜 것을 향한 삶의 과정을 변화시키는 모든 것의 이름이다(1961년 12월 Good Housekeeping Magazine).” 신이 고통을 생명에게 허락한 이유는 신도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 자신도 고통 받고 자신의 일부로 고통을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고통이 없다면 모든 생명의 삶에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 신은 고통만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견디는 법 그리고 고통이 지나가게 하는 법도 창조했다고 나는 믿는다.

 

Posted in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