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현 : 나의 융 심리학 이야기

나의 융 심리학 이야기

조자현(J.H.Cho. M.D., Jungian Analyst, 드림수면의원)

jahyeoncho@gmail.com

 

에세이를 부탁 받고, 이번 글은 나의 융 심리학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고 끝맺어야 하겠구나 생각하였다. 취리히의 융학파 분석가 수련기관인 ISAP ZURICH (International School of Analytical Psychology Zurich) 에 입학하기 위해 원서를 내면서 쓴 긴 에세이는 내가 융학파 분석가가 되기 위해 지원하기 전의 나의 삶들을 이해하고 정리해보기 위함이었고, 이 에세이에는 나와 융의 만남과 지금까지의 여정을 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공의 수련도중 한상익 교수님을 통해 융심리학을 알게 되었다. 이후 자연스레 개인분석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 이보섭 선생님을 만나서 개인분석을 받게 되었는데, 분석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당시 나는 프로이트, 제임스 힐먼, 롤로 메이, 오토 컨버그 등의 글을 즐겨 읽었고, 여러 학파의 치료자들에게 개인지도를 받으며, 내가 장차 어떤 치료자가 될 것인가를 궁금해했다.

스탠포드 대학병원 수면장애센터에서 1년간의 연구, 연수의 기간을 가지게 되면서 나는 평소 관심 있었던 수면장애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자 생각하였다. 내가 살고 있던 팔로 알토 근처의 융학파 분석가 중 한 명과 분석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그 분은 한국분석심리학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미국인 Thomas Kirsch 였다. 이전 국제분석심리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부모 양쪽이 다 융학파 분석가였던 그와의 분석시간은, 개인적인 분석뿐 아니라 융심리학의 여러 역사적인 일들, 그의 중요한 인물들과의 추억들을 들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분석이 진행되면서 나는 나의 수련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분석가를 통해 스위스의 ISAP ZURICH 에 대해 알게 되고, 미국의 연구소들 대신 취리히로 가기로 결심했다. 스위스에서 입학을 허가 받고, 남은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는 기간은 내게 두려움과 떨림의 시간이었다.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내 결정에 대해 무모하다며 우려의 말을 전하였고, 스스로도 이 수련기간이 내게 어떤 경험이 될 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나는 내 속에서 나오는 메시지에 매달려야겠다고 느끼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따르겠다고 내게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래 전에 꾸었던 것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서 나는 말이 끄는 마차의 뒤, 건초더미에 누워있었는데, 마차의 앞에는 중세의 수도사 두 명이 큰 후드가 달린 낡은 망토를 입고 천천히 말을 몰아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날은 따듯하고 연녹색의 풀들이 돋아난 길을 갔다. 그들은 비밀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 많은 사람들은 쉽게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보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비밀스럽고, 우리는 그 방법을 알 수 있어”.

나는 그들의 비밀이야기를 듣고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불안으로 가득했던 마음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처럼 고요해졌다. 이 꿈은 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반복적으로 내게 떠올라 내가 용기 내어 어떤 일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나는 스위스에서 한 마을의 축제를 구경하던 도중,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꿈에서 본 수도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건초가 실린 마차들을 끌고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들의 행렬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곳의 정신이 나를 불렀구나!’

분석공부를 위해 스위스에 머물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첫 일년은 취리히 시내에서 떨어져있는 Kilchberg 라는 곳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토마스 만이 묻혀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창문을 열면 뒤쪽의 언덕에서 소떼들이 풀을 뜯는 모습과 방울소리를 들을 수 있고, 조금 걸어가면, 조그만 나무벤치에서 취리히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에서의 생활은 내 마음을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들어주었다.

다양한 경험을 하기를 원했던 나는 둘째 해부터는 교통이 더 편리한 취리히 시내에서 지내면서, 수업과 개인분석을 병행하였고, 3학기째부터 예비과정을 통과하기 위해 두 학기에 걸친 8과목의 시험 ( Propaedeuticum exams)을 준비하고 치르느라 정신 없이 시간을 보냈다.

책들을 통해 알고 있던 Murray Stein, Mario Jacoby 같은 분석가들과의 수업과 세미나들은 힘든 시간의 비타민음료 같은 활력과 즐거움이 되었다. 강의 시간은 진지한 토론과 웃음이 있었고, 수업 사이사이에는 마을 길들을 거닐며 동료들과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분석가들의 집으로 초대받아 같이 식사하며 개인적인 만남들을 가진 시간들도 떠오른다. 내게 스위스식 요리를 하는 법과 맛있는 송아지고기를 살 수 있는 곳을 가르쳐 준 분석가들, 최고의 커피나 맛있는 샌드위치 가게를 가르쳐 준 분석가들…

한국에서의 전문과정에 해당되는 Diploma candidate 가 되면서는 강의수업의 부담은 줄었지만, 몸은 더 힘들고 고단하게 되었다. 나는 취리히 시내에서 분석실을 구하고 긴 기간을 요하는 피분석가들과 분석을 시작했고, 학교에 있는 분석실도 동료 여럿과 같이 임대해서 사용하였다. 학교의 관리하에 일할 수 있는 취업허가를 신청해서 받았고, 로잔에 위치한 세계적인 경영대학원인 IMD(국제경영개발대학원)의 MBA 프로그램에서 PDE( Personal Development Elective course) 에 참여하여 경영대학원 학생들과 분석시간을 가졌다. 이 학교의 독특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 PDE는 중요한 경영자나 리더가 되기 위해 자신을 알고, 이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수업과정인데, 이 과정에 있는 학생들은 다양한 심리학관련 수업 외에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20시간의 무료 개인분석시간을 받을 수 있고, 배우자도 분석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학교는 학생들의 분석비를 직접 참여하는 치료자에게 지급한다)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을 왕복 4시간이 소요되는 로잔으로 가는 일은 꽤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오고 가는 기차 안에서 땀범벅이 된 셔츠를 입고 나는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 노트북을 켜고, 수퍼비전 받을 사례들을 정리하고, 역에서 내리면 다른 곳으로 가서 집단지도나, 개인지도를 받으러 가는 바쁜 일상이었다.

좋은 사람들 (동료들, 분석가들)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사랑 받는 경험은 무엇보다도 가치 있었다. 내 일에 사람들은 같이 기뻐하고, 걱정하고, 눈물 흘려주었고, 방학이 되면 유럽 곳곳의 자신들의 집에 초대해 지내며, 먹고 마시고 쉴 수 있게 해주었다.

하루는 새벽부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복통에 시달리다, 첫 트램을 기다려 취리히 대학병원 응급실로 간 일이 있다. 분석을 취소해야 해서 나의 분석가 John Hill 에게 알리고, 여러 시간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을 때, 폭설을 뚫고 응급실로 내 분석가가 방문해주었다. 생생히 기억이 난다. 눈이 내린 모자와 코트를 벗은 후, 그는 한동안을 침대 옆에 있다가 갔다. 그는 모자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자신의 분석가가 마지막 시간에 선물로 준 것이라고. 지금 글을 쓰면서 눈이 촉촉하게 젖어오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그는 분석가에서 피분석가로 전해지는 사랑을 이야기 했었구나!

개인 수퍼비전을 담당한 4명의 분석가들은 모두 따듯하면서도 진지하게 내 사례들을 지도해주었고, 내가 졸업시험을 마치자 드디어 나와 동료가 되었다며 누구보다 기뻐해주었다. 졸업논문은 한참을 고민하다 한국의 초분에 대해 쓰게 되었는데, 나의 수퍼바이저이던  Andreas Schweizer 박사가 논문을 지도해주었다. 한국의 여러 지방자치단체에 연락하고, 초분을 만들어놓았던 사람들과 인터뷰하고, 초분 이장에 직접 참여한 것은 귀한 경험으로 남았다. 나는 여러 달을 초분을 찾아 다니며, 초분이 있었거나, 있던 지역에 머무르며, 그것을 지적인 접근이 아닌, 살아있는 나의 경험이 되게 하려 노력하였다.

수련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차분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과정이었다. 처음 생각과 달리, 어떤 성취감이나 자부심보다는, 거대한 인간 정신이라는 영역을 이제야 알게 되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작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분석가가 되면 많은 것을 알게 될 거라는 처음 기대는 사라지고, 어떤 정신 현상을 설명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말을 아끼고 조심스러워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훌륭한 스승들이 보여준 모습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융 그 자신이 강조했던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되어 이런 마음이 바뀌지 않도록 나를 유심히 살핀다. 압구정의 내 클리닉에서 나는 매일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을 접한다. 분석시간이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그 속에서 감동받고 변화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오래 전 이 길을 궁금해하였던 카를 구스타프 융 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5월과 6월에 예정되어있는 스위스와 미국 방문을 생각한다.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고, 낯익은 장소들을 방문하는 여정은 내게 융 심리학이라는 길을 가는 도중 발견하는 길가의 달콤한 샘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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