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사(1978-2008)

한국분석심리학회 30(1978-2008) – 회고와 전망

李符永

 

 

1. 분석심리학의 도입과 전후의 상황

1966년 스위스 체 게 융 연구소를 수료하여 융 학파의 분석가 자격을 얻고(1) 그곳 정신과병원에서 일하던 나는 1968년 5월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아주 눌러앉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분석심리학의 이론과 그에 입각한 정신치료가 한국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분석심리학은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월례집담회, 간호학, 보건학대학원, 각 의과대학 정신과 초청 강연 이외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 철학과를 위시하여 가톨릭 및 개신교신학대학, 종교학과, 고고인류학과 등 인문계 대학 초청 강연 또는 강의,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대화 모임을 통해 한국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학설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체 게 융의 사상이 1968년 내가 귀국하기 이전에는 전혀 우리나라 정신의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물론 없다. 구 경성제국대학의 학부 신경과 정신과학교실 도서실에는 융의 독일어 원서와 융이 간여했던 국제정신치료 의사협회의 1920년대 학술대회의 발표 논문집이 있다. 전란 중에 유실되었지만, 그곳에는 프로이트 전집도 있었다고 하고 당대 독일의 정신의학자들의 정신치료에 대한 저서들도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 당시 공부한 한국인 정신과 의사 사이에서 융이 아주 생소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다.(2)

어떤 면에서는 구미의 경우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정신과 의사보다 종교학자나 신학자, 민담 학자들이 전부터 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1968년 내가 스위스에서 돌아왔을 때 국문학자 황패강 교수가 한국 민담의 원형적 상징성에 대해 열정적으로 연구하여 발표하고 있어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3) 국문학계 융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식지 않고 있다. 원형이 지닌 강력한 치유의 힘이 이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일까. 다만 무의식에 대한 분석 경험이 충분치 못한 경우에는 개념의 이해에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 아쉽다.

나 자신은 융의 사상을 일어로 번역된 융 선집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다. 내가 그 책을 산 것은 아마도 1960년이나 그 한 해 전쯤이었을 것이다. 1961년 초 석사 논문으로 한국 무속의 巫病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때 융의 ‘종교와 심리학’을 참고하였었다.(4) 그때 나는 융보다도 현상학파 루트비히 빈스방거,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토르 E. 프랑클에 관심이 있던 터라 융의 무의식 관에 공감할 수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였다.(5)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시기에 내가 서울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독일어 책방인 명동의 소피아 서점에서 취리히 융 연구소의 연구 논총을 두 권이나 샀다는 사실이다. 그 안에 있는 논문에 흥미를 느꼈을 뿐 내가 융 연구소에서 공부하게 될 줄은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6) 그리고 대학 신경정신과의 주임 교수였던 명주완 교수 환력기념논문집에 실린 나의 민담해석논문(7) 은 내가 취리히 융 연구소의 세미나 논문을 손질해서 스위스에 있을 때 보냈던 것인데 그 논문집이 1965년에 출간되었으니 나의 귀국보다 3년 먼저 한국에 소개된 셈이다.

의과대학에서의 분석심리학

1968년 가을부터 나는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에서 대학원생, 전공의를 대상으로 분석심리학 강좌를 열었고 1969년 1월 1일 서울대 의대 전임 강사로 발령되자 교육과정에 분석심리학설이 조금씩 포함되어 학부 학생을 위한 정신의학 교과과정 중 인격이론, 정신병리, 정신치료에 융의 학설과 분석요법이 부분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분석심리학이 행동과학이나 의학 개론에서 인간 심성을 이해하는 학설로 한두 시간의 강의 시간을 얻게 되거나 4학년 학생의 선택과정 중 한 과목이 된 것은 여러 해 뒤의 일이고 그것도 나의 정년퇴임 후에는 많이 바뀌게 되었다. 의대 4학년 학생들의 호응이 매우 컸던 ‘분석심리학의 이론과 실제’라는 주제의 선택과정은 1982년부터 1991년까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는데 교무행정이 바뀌어 의대의 선택과정 자체가 없어지면서 중단되었다.(8) 그러나 대학원에서는 정규강좌뿐 아니라 분석심리학 분야 연구논문을 처음에는 석사과정에서, 뒤에는 박사과정에서도 지도할 만큼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발전하였다.(9)

대학병원 신경정신과 전공의의 분석적 정신치료 수련

1969년 당시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 신경정신과에서는 전공의 수련을 위해 한동세 교수가 전공의의 정신요법을 적극 권장하면서 정신분석적 정신요법 사례에 대한 집단지도 세미나를 매주 정기적으로 활발히 실시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합류하여 분석심리학적 정신요법 세미나를 매주 실시하게 되어 전공의의 정신치료에 대한 교육이 어느 때 보다 활발하였다. 임상증례 토의 시간에는 한동세 교수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대해 내가 가끔 날카롭게 비판을 하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서 사이가 나빠지거나 나의 활동이 제지받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나의 민담 해석 논문에 관심을 보이고 샤머니즘에 대한 논문을 차례로 발표하던 나를 하와이 동서센터의 연구 프로그램에 추천까지 하여 그의 뒤를 이어 하와이대 ‘문화와 정신건강 연구계획’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학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고 정신분석적 정신치료와 문화정신의학 분야에서 독창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정신과 교과서를 저술하신 분이기도 한데 애석하게도 일찍 돌아가신 것은 한국 정신의학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의 분석

1969년 대학에 들어감과 거의 동시에 나는 분석요법을 환자들에게 실시하였다. 스위스에서도 피분석자 중에 한국인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땅에서 한국인에게 융의 분석요법이 어떤 결과를 나타내게 될지 그것은 나에게 큰 관심사였다.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경험을 종합하여 한국에서의 분석요법상의 여러 문제점과 문화적 특성을 1971년 가을 런던에서 열린 국제분석심리학회에 발표하였다.(10) 서구의 정신치료가 문화가 다른 한국인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진부한 의문은 이미 나 자신이 오랜 분석작업을 통해서 검증하였고 유럽의 소수 동양인 피분석자의 치료를 통하여 확신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귀국 초기의 나의 경험은 피분석자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적절히 이를 다룰 필요가 있음을 알게 하였다. 전공의의 정신치료 중 단례에 관한 연구도 이런 맥락에서 실시되었는데 매우 교훈적인 결과를 얻었다.(11)

아마도 나는 국제분석심리학계에서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전임교수이면서 동시에 융 학파 분석가이고 정년퇴임 때까지 근무한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어떻든 인과론에 바탕을 둔 과학적 합리주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보수적인 의학 풍조 속에서 융의 사상이 제대로 이해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하나에서 열까지 미국을 모방해 온 당시 한국의 정신과 의사에게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성서적 권위에서 벗어난 융의 학설과 현상학적 인간주의적 심리학의 관점을 수용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집단적 권위와 관습을 과감히 버리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동서교류’, 그리고 문제

1971년에서 1972년 사이에 하와이대 ‘문화와 정신건강 연구계획’에 참여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나는 미국식 문화개념과 동서센터의 문화정책에는 약간의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이른바 동서교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의식적 상호 투사현상을 에리히 프롬과 프랑클 등의 융의 학설에 대한 비판이 지니고 있는 모순점을 밝히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12)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취리히 체 게 융 연구소에서 강의하다가 급히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고 귀국하니 한국의 대학과 대학교수의 권위는 중앙정보부의 전횡 아래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 얼마 뒤에 이어녕 교수가 주간으로 있던 문학사상의 청으로 분석심리학적 입장에서 한국민담을 해석하는 글을 연재하면서 ‘악惡’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 당시 우리가 직면하지 않을 수 없던 악을 우리의 문화는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3) 혹시 우리의 무의식에는 악과의 대결, 즉, 갈등을 해소시키는, 우리 나름의 지혜가 숨어 있지 않을까, 서양인과 동양인인 한국인은 과연 무의식에서도 문제해결에서 차이가 있는 것일까 하는 다소 무모한 기대에서 나는 나의 서양인 피분석자의 꿈과 한국인 피분석자의 꿈을 통계적으로 비교하는 연구를 하였다. 잠정적인 결론은 해결 방법이 너무도 다양하여 일정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고 다소의 차이가 보인다면 그것은 남녀 간의 차이일 것 같다는 인상적 사실이었다.(14)

1972년 이후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의 정신치료에 대한 교육은 더욱 강화되어 전공의들의 정신치료 사례에 대해 개인 지도를 받는 제도가 생겼는데 정신치료 사례에 대한 체계적인 개인 지도는 아마 우리나라에서 처음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당시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에는 이정균 과장 서리를 위시하여 한동세, 명호진 교수 이외에 보스턴에서 가르치다가 귀국한 미국 소아정신과 전문의이며 정신분석 수련을 장기간 받은 바 있는 이규원 교수와 독일에서 돌아온 신경정신의학 전문의 이상복 교수 등이 함께 있었다. 작지만 탄탄한 교수진이었고 학문적으로나 임상 교육에서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팀은 잠정적인 것이었다. 신경과가 독립되면서 명호진, 이상복 교수는 떠났고, 이규원 교수는 아쉽게도 보스턴으로 돌아갔으며 한동세 교수는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한동세 교수의 정신분석적 정신요법 세미나는 곧 급보를 받고 미국에서 달려온 조두영 교수에 의하여 대체되어 정신분석 치료의 교육을 계승할 수 있게 하였다.

정신치료 사례연구회

1970년대의 한국 정신의학계는 미국의 역동 정신의학의 영향 아래 있었다. 신프로이트 학파의 학설이 활발히 소개되고 정신치료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그러나 가르칠만한 전문가도 부족하고 서울대 의대처럼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곳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배우고 싶어도 기회가 별로 없는 실정이었다. 이때 오래전부터 개원가에서 정신치료를 열정적으로 해온 한국정신의학계의 원로, 이동식 선생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정신치료 사례연구회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학파에 상관없이 관심 있는   정신과 의사들을 모아 사례토의를 진지하게 해왔는데 처음에는 이근후 교수가 있던 이화여대 의대 동대문병원 소회의실에서 모였다. 나도 몇 번 가서 증례도 발표하고 논평도 하곤 했다. 정신치료학회를 만들자는 이야기도 간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늘 그러기에는 아직 훈련받은 전문가가 너무 부족하니 학회를 만들기보다 먼저 정신치료를 실제로 하면서 사례토의 등 공부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결국 한국정신치료학회를 결성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공교롭게도 서울대학교병원의 정신과 교수들은 암묵적으로 제외되었다. 나는 한국정신치료학회라면 명실공히 한국을 대변하는 정신치료자가 총망라되어야 하고 정신치료를 배우고 교육하는 사람이 모두 참여해야 학회가 발전되지 않겠는가 하는 뜻으로 장문의 글을 써서 호소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나는 정신의학의 세 부분과 학문 분야가 독립된 연구회나 학회를 결성해서 집중적으로 그 방면 연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학회가 학연, 지연에 따라 난립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었다. 불행히도 그 뒤에 정신의학계의 분과학회 형성은 부분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런 끼리끼리 모이는 경향은 비단 한국에 국한된 일은 아니고 국제학회도 언어, 종족, 지역에 따라 비슷한 학회를 여러 개 만드는 경향이 있다.

2. 분석심리학 연구회의 발족과 학회 활동(1978-1985)

전공의의 교육분석

어쨌든 이러한 배경 아래서 내가 1978년 분석심리학 연구회를 발족시킨 데는 주로 두 가지 직접적인 동기가 있다. 무엇보다도 분석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해야겠다는 의욕이 있었다. 전공의를 교육하면서 항상 한계에 부딪힌 것은 교육분석의 경험이 없는 전공의에게 어떻게 무의식의 상징언어, 즉 꿈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교육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1973년부터 전공의의 교육분석을 시작하였다. 나는 분석을 받도록 누구를 지목하거나 개인적으로 권유한 일이 없었다. 분석을 받겠다고 와도 정말 꼭 받고 싶은지 기다려보고 시작하였다. 제 일호 후보자로 용감하게 나선 전공의는 지금 연구원에서 수련교육평가위원회 위원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한오수 교수이다. 그 뒤에 교육분석을 받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났다. 내가 배운 융 학파의 분석은 상당히 자유로운 것으로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파와 같은 엄격한 적응증이라든가 금기가 없고 모든 것은 개인에 따라 융통성 있게 진행하면서 무의식의 의도를 살펴 가는 작업이다. 꿈은 어디까지나 피분석자의 내면 콤플렉스의 표현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분석가는 그 의미를 의식화하는 것을 돕는 자이다. 전공의의 교육분석에서 나는 항상 가까이에서 여러 종류의 역할 속에서 접촉하는 사람을 분석하는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분석작업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오해하고 문제가 제기되기까지는 별지장 없이 순수하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전공의들이 꿈을 적어서 왔고 나도 열심히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하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지 못했다. 불행한 일이었다.

분석에 대한 오해는 결국 알 수 없는 미지의 것, 다시 말해 무의식에 대한 투사 현상이거나 그 역시 자신의 그림자 투사에서 비롯된 분석가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융 학파의 분석에 대한 오해를 풀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폰 프란츠 여사가 묘안을 냈지만 이미 실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분석을 안 받던 전공의의 감정도 잘 보살폈어야 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찾아오는 사람 가르치는 것에만 열중하여 다른 생각은 미쳐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일은 나에게 여러 가지로 큰 가르침을 주었다.

분석심리학 연구회를 발족할 마음을 갖게 된 두 번째 직접적 동기는 취리히 융 연구소에서 수련을 마친 이죽내 선생의 귀국이었다. 이죽내 선생은 대학을 나와 군의관으로 복무할 때부터 나에게 규칙적으로 분석을 받다가 취리히로 유학을 떠났었다. 나는 당시 연구소 소장 (아마도 Guggenbühl 박사)에게 추천서를 보내면서 폰 프란츠 박사에게도 편지를 써서 교육분석을 맡아줄 것을 부탁드렸다. 그녀는 우리의 청을 쾌히 받아주셨으며 나중에 들으니 이 직관적인 한국인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이죽내 선생이 오랜 고생 끝에 성공적으로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다고 하면 과장일까, 이 기회에 합심해서 국내의 분석심리학 수련을 체계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분석심리학 연구회는 이죽내 선생의 귀국 환영연과 함께 발족하였다. 때는 1978년 4월 19일, 곳은 정릉에 있는 한식집 청수장이었고 한오수 선생 이하 나의 교육분석을 받고 있던 몇 사람의 제자들이 그곳에 모였다. 연구 모임의 명칭은 분석심리학 연구회로 하고 회장은 없이 간사를 두어 연락 책임을 맡기로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기록을 보니 회장, 부회장 등 조직표가 되어 있었다. 분석심리학 연구회의 발기인은 나와 이죽내 선생,   한오수 선생 이외에 지금은 각자 자기의 전공 분야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김용식, 우종인, 이철, 조수철 교수 등 정신과 의사들이었고 김영환, 홍성화, 황연화 선생 등 교육분석을 받고 있던 임상심리학자, 또는 일반 의사가 추천되어 창립회원이 되었다. 우리는 연구회의 목적을 분석심리학 수련에 두었다. 교육분석이 항상 강조되었고 정신치료 사례토의와 융의 학설을 공부하고 발표하는 세미나를 위주로 하여 대개 격주로 만나기로 한 것 같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는 공개적인 학술 발표회를 열었다. 사례 지도, 세미나 지도는 나와 이죽내 교수가 맡았고 발표도 자주 했다. 특기할 일은 연구회 창립과 함께 융의 독일어 원서를 강독하는 시간을 매달 규칙적으로 가졌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나와 이죽내 선생이 지도하였고 뒤에는 한오수 선생이 맡아서 지도하였다. 나는 평소에 융의 사상은 독일어로 읽어야 그 정수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분석심리학 입문서의 발간

1978년 9월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분석심리학의 교과서 격인 나의 저서 ‘분석심리학 – C. G. Jung의 인간 심성론’이 일조각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조금씩 꾸준히 팔리는 책이 되었는데 나는 대학에서 정년퇴임할 무렵에야 비로소 이 책의 개정증보판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만큼 그 핵심에서 고칠 것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많은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서 한자를 빼고 한글로 펴냈다. 좀 더 전문적인 연구서로 1999년에서 2002년까지 분석심리학의 탐구 전 3권을 한길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융의 사상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곳에서 나는 그동안의 나의 한국에서의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 종교에 관한 새로운 해석도 내렸다. 나는 이 책들을 나의 분석심리학 입문서를 읽은 다음에 읽어야 할 좀 더 전문적인 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15)

폰 프란츠 Dr. Marie-Louise von Franz 한국의 분석심리학

1978년 10월 한오수 선생이 스위스 취리히 융 연구소로 유학을 떠났다. 그 역시 폰 프란츠 박사와 그녀의 제자 지도를 받았다. 1979년 4월 홍성화 선생이 취리히 융 연구소로 유학차 떠난 뒤를 이어 이철 선생이 스위스 융 연구소로 향했다. 그는 폰 프란츠의 제자 Etter 박사에게서 분석을 받았다. 여러 해 뒤에 이유경 선생과 이보섭 선생이 취리히 융 연구소에 갔을 때에도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폰 프란츠 박사의 제자들의 개인 지도를 주로 받았다.

이런 사실은 내가 처음으로 스위스에 갔을 때 폰 프란츠의 명강의를 듣고는 꼭 그녀의 교육분석을 받겠다고 반년을 기다려 받게 되었고 연구소의 수련을 끝마친 뒤에도 자주 만나서 지도를 받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16) 폰 프란츠는 당시 취리히의 연구소 학생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을 뿐 아니라 융의 레인카네이션 reincarnation이라고 까지 하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취리히 융 연구소의 내적인 갈등을 지켜보았고 그녀와의 개인적인 대화, 그녀의 해박하고도 깊이 있는 저서를 통해서 나는 그녀가 체 게 융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를 정통파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반드시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녀는 융의 충실한 계승자인 동시에 융의 사상을 확대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융의 amplification (확충)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그녀는 새로운 관념을 창출하기 위해서 융의 중심사상을 변질시키거나 변형하는 일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한국의 분석심리학도들이 융을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가르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분석심리학계가 정통파 혹은 폰 프란츠 계열이라고 불리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말이 두 가지의 전제조건, 즉, 무의식의 창조성에 대한 확신, 개인의 다양한 전체성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폰 프란츠 여사를 한국으로 초빙하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있었다. 일본 관광의 기회가 있어서 오신다고 해서 꼭 한국에 들러달라고 했으나 일정을 아무리 조정해도 김포공항에서 2시간 만날 여유 밖에는 얻지 못해 포기했고 그 뒤로는 건강이 좋지 않아 기회가 없었다.

1981년과 82년 사이의 기록이 유감스럽게도 부실한 상태이다. 그 무렵이 내가 담석증으로 병원에 누워서 고생하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되고 1982년은 내가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회장직을 83년은 그 이사장으로 태평양정신의학회도 있어 매우 바쁘던 시기였다. 1982년 초는 스위스 문화재단 PRO HELVETIA의 초청으로 취리히로 가서 3개월 정도 체류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의 수첩을 보면 대체로 거의 매달 격주로 융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장과 고시위원장으로서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회장(1982), 특히 신경정신과 전문의 고시위원장 (1983-1986 )으로서의 활동에 분석심리학과 관련 있는 것은 신경정신과 전문의 고시에서 정신치료 실지 사례기록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시험을 치게 한 것과 정신과 면담에 관한 시험을 실지 환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17) 이를 계기로 각 수련병원에서 정신치료를 조금이나마 실제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신치료의 시험 답안이다. 종전까지는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이나 정신분석적 정신치료의 입장과 관점이 정답으로 당연시되었다. 정신치료에서 정신분석 요법이 유일 절대의 치료가 아닌 이상 이 점은 시정되어야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 정신치료 의학파를 대표한다고 할만한, 국제적으로 공인된 분석가는 융 학파밖에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정신치료 수련경력에 근거하여 학파를 대표할 만한 전문의를 소집하여 정신치료에 관한 시험문제와 답안을 놓고 토의하게 하여 의견이 일치되는 답안과 일치되지 않는 답안을 가려서 일치되지 않는 경우 각 답안을 모두 정답으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시험관의 조합도 한 학파에 치우치지 않도록 유의했다. 이 전통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내려왔는데 정신치료의 학파를 대표하는 전문가가 그 당시보다 한층 다양하고 뚜렷해진 현재 전공의의 정신치료 교육에서나 전문의 시험에서 다양한 견해의 포용이라는 원칙은 계속 유의해야 할 점이 아닐 수 없다.

분석심리학 연구회가 언제부터 학회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는지 유감스럽게도 정확히 모른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세부 분야의 학회를 연구학회라는 명칭으로 연계하여 약간의 지원을 하는 규정을 만든 것이 1984년 9월이니 분명 그 이전일 것이다.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1983년 스위스 문화재단 프로 헬베티아 Pro Helvetia의 지원으로 체 게 융의 사진 전시, 영화, 강연 행사를 할 당시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C. G. 사진 전시회 행사

1983년의 융에 관한 학회의 행사는 한국분석심리학회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업 중의 하나이다. 스위스 문화재단 PRO HELVETIA은 융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융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사진 전시와 융의 인터뷰 기록 필름과 강연 등을 포함한 큰 행사를 하였는데 그때 만든 사진과 사용한 필름의 카피를 원하는 나라에 대여하고 원한다면 영구 보관하도록 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무료이었고 단지 한 가지 조건은 반드시 융에 관한 강연을 해야 하고 두 지역에서 행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바로 주한 스위스 대사를 통해서 프로 헬베티아에 이를 신청하여 성사시켰다. 서울에서는 출판문화회관에서 사진 전시, 영화를, 강연은 같은 곳에서 내가 융의 사상이 갖는 현대적 의의에 관해서 하였는데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사진 전시의 전야제에는 프레이몽 Fraymont 스위스 대사, 정일영 전주 스위스 한국 대사, 그리고 정신의학계의 동료들이 모였는데, 연병길, 송지영, 최훈동 선생 등 여러 분석심리학회 회원들과 서울대의대 신경정신과 교실원들이 행사를 많이 도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융의 천연색 초상이 든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남은 것이 없다. 전시행사의 두 번째는 당연히 이죽내 선생이 있는 대구였다. 경북대학교 학생회관에서 모든 행사가 성공리에 진행되었다. 이죽내 선생이 융과 동양사상에 관한 강연을 했는데 이 역시 대성황이었다. 이 행사를 위해 서울에서는 한국분석심리학회 간사 연병길 선생과 서울대의대 신경정신과 교실원들, 그리고 대구에서는 경북대 정신과 교실원들이 수고를 많이 하였다.

1984년 한오수 선생이 스위스 융 연구소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고 뒤이어 이철 선생이 귀국하여 학회의 활동이 한층 더 활발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오수 선생은 그동안 중단되었던 융의 독일어 원서 강독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86년의 몇 가지 괄목할만한 성과로 이어졌다. 분석심리학회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3. 한국분석심리학회의 수련교육과 학술지 (1986-1997)

수련계획수립과心性硏究 발간 (1986)

그 하나는 분석가 수련계획의 수립이었고 또 하나는 학회지 心性硏究의 발간이었다. 분석가 수련계획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숙원이었다. 스위스에서 돌아온 한오수, 이철 두 사람이 비록 아직 국제학회 정회원은 아니었으나 공부한 배경과 연한으로 보아 ‘그에 대등한 자격’이라고 인정할 만했다. 한오수 선생은 스위스 융 연구소의 과정을 모두 이수했고 마지막 관문인 졸업논문과 최종시험을 남겨두고 있었으나 국제학회 개별회원의 자격규정을 충족했고, 이철 선생은 귀국 후 부족한 지도분석을 나에게 일 년 이상 규칙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도 겸손한 탓인지 국제학회   개별회원 신청을 차일피일 미루어 애를 태우게 하였다. 한오수 선생은 상당히 뒤늦게 1995년 국제학회 개별회원 신청을 하여 심사를 통과, 정회원이 되었다.

새로운 학회의 수련규정은 취리히 융 연구소의 모델을 주로 따랐다.(18) 첫 번째 예비 수련과정의 후보 중 예비 수련과정 수료시험 응시자격을 충족하는 사람이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된 것은 그 뒤 몇 년 지나서였다.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하던 전은주 선생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정신과 전문의 서동혁 선생이 첫 후보자였다. 당시 서울중앙병원 한오수 교수의 방에서 구술시험이 있었고 두 사람 모두 합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心性硏究는 글자 그대로 인간심성에 관한 연구논문은 다 받아들이는 것을 원칙으로 출발한 학술지이다. 한 가지 조건은 연구논문이 융의 분석심리학과 관련이 있어야 하고 융의 인용이 적절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창간호에 김열규 교수의 논문이 실린 것은 이 까닭이다.(19) 학회 안에서는 초대된 기고자가 아닌 한 정회원의 논문만 싣기로 했다. 설익은 논문을 융의 이름으로 난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창간 당시 심성연구의 발행인은 내가, 편집인은 이죽내 선생이, 편집위원은 이부영, 이죽내, 장환일, 한오수, 김종억, 이철, 이택중 등 7명이었다. 뒤에 학술지의 격을 높이기 위해 편집자문위원을 두고 나와 인연이 있는 해외의 융 학파 분석가를 초대하였는데 스위스의 폰 프란츠를 위시하여, 국겐뷸, 미국의 머레이 슈타인, 데트로프, 마툰, 이탈리아의 카로테누토, 독일의 자이퍼트, 일본의 가와이 등이 쾌히 응낙하여 심성연구 2권 1호부터 그 이름이 학술지 후미에 오르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이기영을 자문위원으로 모셨다. 해외 자문위원들에게는 학술지의 교환을 제안하여 시카고 융 연구소에서는 연구논총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융 저널을, 일본 융 클럽에서는 Psyche라는 잡지를 정기적으로 보내왔다.

의욕적으로 다소 엄격한 규정으로 출발한 학술지는 처음 몇 번은 비교적 번듯하게 나왔지만 차차 전문가 동인지 같이 되어 논문의 질은 괜찮은지 모르나 양적으로 원고난을 겪게 되었고 게다가 재정난까지 겹쳐 일 년에 두 번 내던 것을 한 번에 묶어서 내기도 하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수년 전부터 한국융연구원의 졸업논문이 나오면서 차차 회복되어 이제는 명실공히 충실한 학술지로 발전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심성연구는 아직도 내가 발행인으로 되어 있으나 편집인은 줄곧 이죽내 선생이 맡아왔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한국융연구원 평의원인 이유경 선생이 여러 해 편집 일을 맡았고 최근에 편집 실무는 한상익, 이도희 선생이 수고해왔다. 금년 초부터 한오수 선생이 편집인이 되면서 이도희 선생이 실무를 책임지고 강철중 선생이 함께 실무를 맡게 되어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된다.

4. 해외 연구소 분석가들과의 접촉

분석심리학회의 대외활동, 특히 해외 학자들의 초빙이라든가, 해외 연구소와의 관계, 한국에서 수련한 사람의 국제학회 가입 등, 여러 사항은 사실 한국분석심리학회의 공적인 활동이기는 했으나 일이 성사되는 데는 개인적인 관계가 여러모로 도움이 된 것 같다. 어느 모임의 리더, 혹은 어느 분야의 개척자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늘 책임의식과 사명의식 같은 것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집착이라면 집착이기에 그런 부담을 갖지 않는 사람은 도가 통한 사람이거나 사회적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행운아이다. 나는 그만큼 도가 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인지 대학교수로서 학회나 연수로 해외에 나가면 정신의학의 동향과 함께 분석심리학 분야 사람들이나 연구소 등을 찾아 이것저것 남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살펴보기도 하고 한국의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미네소타에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78년 5월부터 3개월간 미네소타대학에 머물고 있을 때 나는 거기서 우연히 취리히 융 연구소의 동학을 만났다. 그녀는 그곳에서 개업하고 있으면서 대학 정신과 외래 교수로 있었다. 가까이 사귀지는 않았으나 진지하고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던 동료이었다. 하루는 점심 식사에 초대받고 그녀의 집으로 갔는데 식사를 작은 식탁 두 개를 마주 보게 세워놓고 그 위에 차려놓았는데 식탁 사이를 5, 6 센티 정도 띄워놓고 있었다. 이 기묘한 식탁 배치에 속으로 놀랐지만 그래도 밥을 잘 먹고 헤어졌다. 그녀는 국제분석심리학회 학술발표 논문집의 편집인으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그 관계로 그 뒤에도 나와 가끔 서신 왕래가 있었는데 근년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그녀는 환자의 치료자에 대한 전이로 인하여 빚어지는 문제가 미국에서는 심각하다고 개탄하고 있었는데 그 식탁 사이의 간격은 바로 전이를 차단하는 그녀의 일상적인 의례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 생각했다. 다른 한편 오죽하면 그러겠는가, 미국의 실정은 우리와 많이 다를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혹시 내가 손님을 품위 있게 모시는 유럽 귀족의 오랜 전통을 모르고 이것저것 상상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좀 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머레이 슈타인 박사 Dr. Murray Stein

시카고 융 연구소의 머레이 슈타인 Murray Stein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미네소타 정신과 의국에서 발표한 나의 논문을 보냈더니 아주 호의적인 반응을 보냈었다. 훗날 국제학회의 차기 회장, 혹은 회장으로 우리 회원이 국제학회 개별회원의 심사를 받을 때 심사를 담당하였고 한국 융 분석가협회 KAJA를 국제학회에 가입시킬 때나 특히 협회를 수련학회로 격상하는 일을 적극 지지하고 격려해 준 사람으로 늘 감사하고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이주하여 기존의 취리히 융 연구소에서 분리해 나온 새로 생긴 융 분석가 수련센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수련은 학회에서 해야지 연구소에서 독립적으로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나는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매사에 긍정적이며 지지적인 사람이 이점에서만은 완고한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퀴스나하트의 융 연구소와의 부정적 관계와 무관치 않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서양식 분별이 아니고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동양식 융합의 원리로 학회 곧 연구소의 체계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태평양학회안

1980년대에, 우리 학회에 국제학회 정회원이 2명밖에 없을 때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로드립 Broadrib이라는 융 분석가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한국, 일본,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가 모두 개별적으로는 국제학회에 가입할만한 회원 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니 합쳐서 태평양 융 심리학회를 만들어서 수련교육도 공동으로 하는 등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의 가와이 교수에게도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나는 별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실제로 그런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서 비싼 돈 들여서 호주를 왔다 갔다 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불확실했다. ‘태평양’이라는 말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문화적으로는 전혀 관계가 없으면서 단지 정치적 군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다분히 패권주의적 용어로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의견을 말했고 그 일은 없던 일로 낙착되었다. 당시 국겐뷸 Guggenbühl이 국제학회장이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해당국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입장이었다.

뉴욕 연구소 C. G. Jung Institute of New York 지원안

이보다 훨씬 뒤에 뉴욕 융 연구소의 소장이던 포가티 Fogarty 박사가 뉴욕 융 연구소가 한국의 분석가 수련을 돕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는 한국에 특별한 관심이 있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도 ‘노’였다. 이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가 당시에는 분명치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 나는 미국의 수많은 융 분석가의 성향과 자질을 무조건 신임할 만큼 이들을 잘 알고 있지 못했다. 왜냐하면 미국뿐 아니라 이 세계에는 실제로 너무도 다양한 융기언 Jungian (융 학파 사람)이 있고 때로는 융이 아닌 것을 융으로 알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욕 융 연구소는 훌륭한 도서실과 원형적 상징에 관한 훌륭한 자료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뉴욕에 갈 일이 있으면 그곳에 들려서 책도 사고 도서실의 자료도 보곤 했다. 물론 그곳에도 훌륭한 분석가가 있음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연구소 C. G. Jung Institute of San Francisco

샌프란시스코 융 연구소를 방문한 것은 아마 1984년 여름 내가 뉴욕대학 의료원 정신과 연수를 마치고 귀국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내 소개를 미리 하고 연락해둔 탓인지 그곳 분석가 그룹 사람들이 따뜻한 환대를 해주었다. 평소에 폰 프란츠 여사가 샌프란시스코에는 괜찮은 융기언이 있다는 말을 했었고 당시 나는 그레이필라이트 유형검사에 관심이 있던 터였으며 죠셉 헨더슨J. Henderson 같은 대가는 ‘ 인간과 상징’에서 익히 낯익은 존재였는데 이들이 모두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고풍스러운 융 연구소의 홀에서 5, 6명의 회원이 둘러앉은 가운데 내가 간단히 나의 샤머니즘 연구에 관한 연설을 한 뒤 저녁 대접을 받고 회원 중 한 사람이 꼭 자기 집에서 자라고 해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때 그 집이 심성연구의 편집자문위원이 되어준 데트로프 W.K. Detloff의 집이었다. 필라이트 Wheelwright는 쾌활한 할아버지와 같았고 헨더슨은 온화하고 단정한 신사였다. 그곳에서 시노다 볼렌Sinoda Bolen도 만났다. 또한 반갑게도 취리히 융 연구소 동기동창, 마릴린 나지본드 Marylin Nagy-Bond가 나와주었다. 취리히에서 결혼하여 결혼식에도 간 일이 있는데 아이가 장애아라 했다. 슬픔과 고통이 그녀로 하여금 철학 공부를 하게 만들었던지 그녀는 융과 철학에 관한 두꺼운 책을 썼다. 그 만남이 그렇게 일시적인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 그 뒤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찾지 못했다. 토마스와 진 커쉬Thomas and Jean Kirsh 가 한국을 다녀가면서 뉴욕에 오면 돌아가는 길에 꼭 들리라고 했는데도 들리지 못했다. 사람들도 이제는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하니 내가 그들을 잊은 것은 아니다. 그때 자상하게 보살펴준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의 터줏대감이고 서울대 정신과 의국의 선배이신 김익창 선생님과 그 사모님에 대해서도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회상할 따름이다.

보스 정신분석가들 Psychoanalysts in Boston

한 번의 만남이지만 두고두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분석가와의 만남 가운데의 하나는 보스턴 정신분석 연구소와 맥린 McLean 정신병원의 몇몇 정신분석가들이었다. 점잖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중간에 주선해준 이규원 교수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나는 이들에게서 학파를 초월한 신뢰감을 느꼈다. 프로이트학파에도 이렇게 좋은 분석가가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이것은 아마 1980년대의 일이었을 것이다. 훨씬 뒤에, 그러니까 2000년 맥린병원에서 미국 표현정신병리학회의 학술모임이 있을 때 나는 다시 보스턴을 찾았는데 그때는 보스턴 융 연구소의 융 분석가를 만나고 싶었다. 그 당시 융 연구소 소장 휼과 또 한 사람이 맥린으로 나를 찾아와서 반갑게 만났는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학회장을 알아보려고 맥린병원으로 전화를 해서 물어보았더니 전화받은 사람이 “내가 지금 당신이 융기언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가르쳐 줄 수 없다.“ 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혔다.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융에 대한 이토록 집요하고도 편협한 증오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이 그 20년 전에 내가 보스턴의 몇몇 정신분석가들에게서 느꼈던 좋은 이미지를 깨뜨리지는 못했다.(20)

국겐뷸 박사 Dr. A. Guggenbühl-Craig

국겐뷸 박사는 나의 최초의 분석가 리클린 F. Riklin과 사무실을 함께 쓰기도 했고 서로 가까운 사이였으며 리클린이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뒤 취리히 융 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많은 노력을 기울인 분이며, 국제분석심리학회 회장을 지냈다. 그분은 내가 취리히에 갔을 때 찾아가면 한국에 가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곤 했다. 연세도 있고 몸도 불편한 상황이어서 좀 망설였는데 다들 좋다고 해서 1989년 4월 부인과 함께 초대해서 서울대병원에서 강연을 듣고 학회 회원들과 회식, 그리고 경주 여행을 다녀오시게 했다. 불편한 점도 많았을 테지만 한국이 대단히 다이내믹하다고 두고두고 한국에서의 체험을 못 잊어했다.

정신분석학회 American Academy of Psychoanalysis, New York에서

정확하게 몇 년도였는지 모르지만- 아마 1990년대 중반경- 뉴욕에서 정신분석가로 개원하고 있는 김해암 선생의 친절한 주선으로 뉴욕에서 열린 미국 정신분석학회의 학술대회에서 김해암, 김병석, 이한수 등 뉴욕의 한인 정신분석가와 함께 공자의 사상과 자기실현에 관한 발표를 한 일이 있다. 우리나라 동료들과 같이 한 발표여서 그랬는지 융 학파 사람으로서 그 학회가 전혀 남의 집 같지 않았다.

앤 율라노브 교수 Prof. Ann Ulanov

1992년 8월 시카고에서 열린 국제분석심리학회에 참석하여 공자의 ‘천명’ 天命(21)에 대한 발표를 한 일이 있는데 거기서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 교수 앤 율라노브 Ann Ulanov의 강연을 감명 깊게 들었다. 그 뒤였던지 율라노브 교수가 한국인 제자를 통해 내가 샤머니즘의 연구를 해온 것을 알고 연구논문을 요청해 온 일이 있고 그것을 학생들의 참고문헌으로 삼는 등 호의적으로 평가하더니 나를 그곳 석좌교수로 추천하여 1996년 그곳에 가 있었던 적이 있다. 그녀가 맡은 강좌가 정신의학과 종교였으니 내가 기여할 일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샤머니즘에서의 고통과 치유의 상징에 관한 강의를 했다. 여러 가지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시간들이었다. 아쉬웠던 것은 1년간 있게 되어있는 것을 한 학기만 있겠다고 했기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뉴욕 융 연구소의 학생들이 따로 시간을 내달라고 한 것을 들어주지 못한 점이다. 어떻든 이런 인연으로 한국융연구원의 초창기 입문자 중 하나였던 이나미 선생이 유니언 신학대학원과 뉴욕 융 연구소를 들어가게 되었다. 다행히 이 선생은 자브리스키 Zabriskie라는 좋은 분석가를 만나서 훌륭한 논문과 함께 그곳을 졸업하여 한국에서 활동 중이다. 뒤에 한국융연구원이 율라노브 교수를 초청하여 강의를 듣게 되어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토마스와 진 키르쉬 박사들 Dr.Thomas and Jean Kirsh

한국분석심리학회의 예비과정 수련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했던 서동혁 선생의 경우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수련 받던 사람을 미국의 연구소로 보낸 첫 사례였다. 이제까지 스위스로는 보냈으나 미국에는 보낸 적이 없었다. 여기에는 국제학회 회장을 지냈고 한국에도 다녀간 샌프란시스코 융 연구소의 토마스 키르쉬(커슈) Thomas Kirsh와 그의 부인이며 분석가인 진 키르쉬의 도움이 컸다. 토마스 키르쉬와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나는 1971년 런던의 국제분석심리학회에 갔을 때 키르쉬라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분석가를 만났다. 그의 논문을 취리히 융 연구소의 연구논총에서 본 일이 있었는데 그분은 아주 소탈하고 친절한 분이었다. 한국분석심리학회 연구회원이었고 서울대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정신과 전문의 이정희 선생이 수면연구차 미국 서부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분석을 받기를 원했다. 나는 그때 런던에서 만난 키르쉬 씨가 생각나서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썼다. 답장을 보고 놀랐다. 답장은 내가 생각한 사람의 아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했다. 알고 보니 제임스 키르쉬 James Kirsh에게 한 편지를 그의 아들 토마스 키르쉬가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정희 선생은 토마스 키르쉬의 분석을 받았다. 그러다 이분이 국제분석심리학회 회장의 자격으로 한국에서 열린 세계정신치료학회에 초청되어왔고 한국의 융기언과 만나게 되었으며 서동혁 선생을 위해서 외국인 수련프로그램을 특별히 마련하게 된 것이다. 토마스, 진 키르쉬 두 분 또한 한국에 남달리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토마스 키르쉬는 그의 저술, 국제 융 심리학계의 역사 가운데서 한국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다소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는데 시정을 못 했다. 진 키르쉬는 꿈의 해석을 우리와는 많이 다르게 해서 좀 놀랐다. 인간적인 신뢰와 우정 앞에서 그 사람과의 학문적 관점의 차이는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여기서도 경험했다. 어떻든 서동혁 선생은 한국과 미국의 퓨전 제 일호로 국제학회 정회원이 되었고 개원했으며 한국융연구원의 교육 및 지도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가와이 하야오河合隼雄 교수, 히구찌 가즈히꼬樋口和彦 교수와 그의 동료 후학들

해외 융 학파 분석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마당에 일본과 스위스의 분석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융 학파 분석가 1호이며 일본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인 가와이 하야오 씨는 1962년 초 취리히 융 연구소 개강파티에서 처음 만났고 그 뒤부터 줄곧 친분을 지켜온 분이었다. 취리히에서 공부를 시작한 것은 나와 같으나 이미 미국에서 분석을 받은 탓도 있고 갑자기 교수 자리가 나서 귀국하게 되어 연구소에서 배려하여 조기 졸업을 하게 되었다고 본인이 말해서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것은 나를 배려해서 한 말이었다. 나는 그렇게 빨리 공부를 끝낼 생각이 없었으니 그저 기쁘게 그의 귀국을 축하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는 나보다 조금 일찍 귀국하여 일본 땅에 분석심리학의 씨를 뿌렸다. 그 무렵 가와이 씨의 뒤를 이어 히구찌, 미유끼, 나중에 아끼야마 씨 등이 취리히 융 연구소에 합류하였는데 같은 동양인으로서 자주 만나서 서양인과 우리는 아무래도 사고방식이 다르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귀국 후에도 여러모로 교류가 있었다. 일본 융 클럽 창립 10주년 기념 강연에도 초대를 해주어 가와이 씨와 함께 강연하였다. 가와이 교수는 모래 놀이치료팀의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강의를 해주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분석심리학회에서 초대해서 강연을 듣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가와이 교수는 원래 수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미국에 가서 임상심리학을 하면서 융 분석을 시작했고 취리히 연구소에서는 마이어 교수와 프레이 여사의 분석을 받았다. 내가 처음부터 융을 독일어로 시작한 것과는 달리 그는 영어로 계속 강의를 들었다. 그는 노이만의 의식의 발달단계와 관련해서 일본 신화의 모성적 배경을 밝히는 논문으로 연구소를 졸업하였다.

그러한 배경과 일본 문화의 특성, 그 당시 일본 사회에서의 융 사상의 수용 태도, 무엇보다도 그의 개성 등, 복합적인 요인이 결합된 결과이기는 했으나 분석심리학을 처음 도입하는 양상이 나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내가 분석심리학의 피상적인 유행을 경계하고 밖으로 나가기보다 작은 모임의 수련과 교육분석에 주력했다면 그는 별로 그런데 개의치 않고 종횡무진으로 대내 대외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 같았다. 일본 융 클럽이라는 전국적인 조직이 탄생하였고 융의 정통적인 치료법이 아니기도 하고 인공적으로 만든 인형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내가 별로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도라 칼프의 모래 상자 놀이를 일본 전국에 퍼뜨렸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보급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그의 이름처럼 빠르고 바지런하고 왕성한 창조력의 소유자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한 여러 해 전부터 일본 임상심리학자들의 사회적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해 왔는데 만년에 이르러 너무 그 때문에 애를 쓰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였다. 또한 내가 궁극적으로 우리나라 민담에서 보편적이며 원초적인 원형상을 찾을 때 그는 일본인의 마음을 먼저 읽으려 했고, 내가 융의 이문화 체험과 자기실현 속에서 우리 아시아인의 과제를 생각할 때 그는 우주인은 어떤 꿈을 꿀까를 상상하고 있었다.(22)

지금 보면 상호 간에 장단점이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의 융 분석가 협회는 2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제법 큰 단체로 발전하였는데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융 클럽은 잡지 Psyche를 종간하면서 해체되었고 모래놀이는 너무 많은 아마추어 때문에 재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번듯한 장소에서 융 연구원을 중심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일본의 동료, 후배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최소한 ‘근친상간’의 퇴행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문화 배경의 분석가와의 교류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서로 깨닫고 있는 터이고 그런 뜻을 구체화한 것이 한국융연구원의 외래교수 제도였다. 한국융연구원이 개원한 뒤 가와이, 히구찌 양 교수를 연구원의 객원교수로 초청하고자 했을 때 두 분 모두 쾌히 응낙했다. 가와이 씨는 마침 고이즈미 총리의 청으로 내각에 들어가 일본 문화재청 장관을 하던 때여서 유감스럽게도 이름만 걸어놓고 실제로 와서 강의나 기타 지도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뇌출혈로 의식불명인 채로 일 년여를 투병하다가 작년 여름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잠시나마 히구찌 교수를 한국융연구원의 외래 교수와 지도 분석가로 모실 기회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의 인간미 넘치는 인품과 깊은 공감능력은 가와이 씨와는 또 다른 개성을 보여주어 연구원들이 모두 좋아하였다. 나는 또 그의 초청으로 그가 총장으로 있는 교토분교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그 대학원 상담 사례 토의에서 논평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일본 융 분석가 수련센터의 가와이 도시오, 아키타 이와오 교수 등이 한국융연구원에서 강연을 하는 등 분석심리학의 한일교류가 조금이나마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는 본격적인 학술교류를 위해서 정기적인 한일 및 아시아 융기언들의 학술모임의 하나로 Asian Forum for Jungian Psychology 같은 것을 마련하자는 제의를 하고 회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신중한 일본인 기질로 미루어 볼 때 성사되려면 많이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슬러 박사 Dr. G. Isler 스위스의 심층심리학 연구소

퀴스나하트의 융 연구소에서 떨어져 나와 1994년 3월 독자적인 연구소를 마련한지 십여 년이 된 융과 폰 프란츠에 의거한 심층심리학 연구소와는 창립 초부터 접촉을 가지고 있고 그 초대 소장인 이슬러 박사는 한국융연구원 개원과 함께 우리나라에 초대되었으며 에터, 압트 박사 등 모두 진정으로 무의식의 창조적 의도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학문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쌓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과의 우의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신학대학을 나온 미국 목회학 박사이고 오랫동안 목회자로 봉직했던 심상영 박사는 이 연구소의 첫 한국인 졸업자이며 분석가이다. 몇 해 전부터 이현구 신부님이 그곳에서 정진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니클라우스 성인의 암자가 있는 알프스 성지 가까이의 수녀원 피정의 집에서 세미나를 열고 있는데 작년에 강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 가 함께 지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따뜻한 인간적인 우애가 특히 감명 깊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40명 정도의 수강생이 있었는데 호주와 독일에서 온 연구원에게 왜 당신 나라의 융 수련센터에 안 가고 이곳에 왔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그곳에선 융을 배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가. 우리는 융을 얼마나 충실히 가르치고 있는가. 한국의 융 분석가들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아 있을 수 없듯이 본질을 떠난 어떤 ‘새로운’ 기술도 그것은 죽은 기술에 불과하다. 기술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표층적인 의식세계에 집착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인간을 이해하고 치료하는데 모든 것이 필요하다. 다만 그것을 융의 이름으로 홍보하지 말라는 것이다. 집단치료도 유익한 치료 방법이다. 그러나 융의 궁극적 치료 목표는 개인분석을 통한 각 개인의 자기실현이다. 집단에 의해 도달된 통찰은 집단에 의해 무너지기 쉽다.

중국 쳉두의 양얀춘 교수 Prof. Yang Yan Chun in China

2007년 여름 나는 중국에서 분석심리학 및 분석적 정신치료에 관한 워크숍이라는 매우 귀중한 자리에 초대받았다. 사천성 쳉두(성도)에서 약 200명의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들과 함께 하였는데 이 일련의 행사는 사천대학 정신과의 양얀춘 교수의 배려로 성사되었다. 양 교수는 내가 대학에 있을 때 세계보건기구의 연구비로 아시아 5개국 6개 처에서 진행한 의료추구 행태에 관한 연구에 공동 연구자로 참여했던 사람으로 한국에도 다녀간 일이 있어 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융 학파의 분석을 받은 일은 없으나 미국 유학 시절 읽은 책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체험을 통하여 융의 심리학을 깊이 터득한 사람이다. 양 교수는 중국에서의 정신치료의 발전을 위해 한국 정신치료학계와의 교류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런데 생물학 일색의 한국 대학 정신과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한국융연구원 같은 수련기관에서 외국인을 위한 수련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연수를 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중국 광쟈오에서는 국제분석심리학회의 지원 아래 정기적으로 융 심리학 학술모임이 열리고 있다. 분석가 없이 이론적인 연구발표만 해서 문제라고 생각해 왔는데 최근 한 사람의 분석가가 그곳 교육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상하이에는 독일 정신과 의사들의 도움으로 정신분석의 수련을 받는 사람이 20명이 있다고 하며 쳉두의 학술대회에서 나는 아주 괜찮은 발표를 한 여성 정신분석가를 만났다. 중국은 우리가 도울 필요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동안에 급속도로 발전하여 도울 필요가 전혀 없는 단계에 오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이해하기보다 지식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있는 법이다. 워크숍의 한 참가자가 질문을 했다: 선생은 융 학파의 원형 심리학파입니까, 아니면 발전학파입니까. 앤드류 새뮤엘의 Post Jungian이라는 책을 읽은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하였다. 원형과 집단적 무의식 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융 학파의 분석가라 할 수 없습니다.

4. 1987 이후

1987년 나는 한국분석심리학회 회장직을 이죽내 교수에게 넘겼다. 내가 어쩌다 그렇게 오래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나도 모른다. 학회는 변함없이 학술 활동을 꾸준히 계속하였으며 새로 회보를 매달 내기도 했다. 회장은 한두 번씩 연임하면서 한오수, 이철 선생으로 이어졌다. 분석 받는 사람의 수도 늘어났다.(23)

1987년에서 1997년 대학의 정년퇴임 시까지 나는 분석심리학 분야 이외에서도 국내외에 할 일이 많았다. 1987년에는 동아시아문화정신의학회를 창립하였는데 문화정신의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정신의학의 여러 다른 학파의 사람을 회원으로 한다는 원칙을 세워 우리나라에서는 이죽내, 김광일, 이시형, 이호영, 김현우, 장환일 교수들을 모셨다. 1988년부터 또한 나와 국제표현정신병리학회와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비록 학문적인 입장은 달랐지만 환자의 창조적 표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류는 따뜻했고 보람된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자유롭게 융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또한 대학 정신과 주임교수로서 의료 추구 행태라든가, 진단분류 등 몇 가지 대형연구도 하고 세계보건기구의 지역 정신보건정책에 공감하고 정신과 환자에 대한 편견문제, 정신사회 재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던 때이기도 했다.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 정신보건 자문관이던 신푸꾸 박사가 지역 정신보건이나 세계정신사회재활협회 일로 해외에서나 국내에서 만날 때마다 우스갯소리로 나를 지목하여 이 사람은 융기언이라고 말하면서 융기언과 지역사회 정신의학이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지 흥미롭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정신분석가란 높은 의자에 앉아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비싼 분석료를 받고 귀족들이나 상대하는 위인으로 알고 있는 것이 일반 사람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국립대학에서 만난 한 독일인 교수도 내가 그곳의 정신사회 재활시설에 관심이 있는 것을 보고 분석가라고 해서 사실 처음에는 오해했었노라고 고백한 일도 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도 융이야말로 정신분열증 환자를 심리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한 사람이고 정신과 환자 속에 그의 병적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환자의 이른바 병적인 체험 속에는 보통 사람의 무의식에 있는 엄청난 신화적 요소가 들어있음을 발견함으로써 환자를 존중하는 마음을 일깨워 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다시 말해 융은 정신과 재활과 지역 공동체 정신의학의 이론적 토대를 일찍부터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 프로이트, 융, 실존 분석학파의 치료자들이 사이좋게 만성 정신분열병 환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생활하면서 치료에 임했던 스위스 북동부의 치료공동체인 빈스방거가의 사나토리움벨뷰에서 나는 정신사회 재활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다. 정신과 의사로서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면서도 분석심리학의 수련교육은 지속되었으며 분석가로서의 진료 또한 중단되지 않았다.

융 학파 분석가의 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늘었다. 1995년 이유경 선생이 취리히 융 연구소를 마치고 돌아왔고 1998년 7월 서동혁 선생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융 연구소에서 수학하다 귀국하였으며 2001년 8월에 국제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2001년 이보섭 선생이 취리히 융 연구소를 수료하고 9월에 귀국하여 학회나 연구원의 활동이 한층 활발해졌다.

한국융연구원의 개원 (1998)

1998년 3월 한국융연구원이 개원하면서 융 학파 분석가 수련이 한국분석심리학회에서 한국융연구원으로 옮겨졌다. 학회 정회원이며 평의회위원이 고스란히 융 연구원의 평의원이 되었기 때문에 핵심 멤버가 옮겨간 것은 아니었다. 한국융연구원의 개설과정과 활동사항은 따로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여기서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당시 한국분석심리학회(회장 이철)의 뜻있는 회원들이 분석심리학 발전기금을 마련하여 연구원의 여러 기자재 등을 지원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늘 마음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도와주신 분들에게 연구원이 얼마나 성장하였는지 보여드리게 되어 기쁘다.(24)

한국융연구원이 수련교육에 집중하게 되면서 한국분석심리학회는 일반인의 교양교육, 분석심리학 기초강좌, 정신과 전공의교육, 심성연구 발간, 연구원 행사의 대외홍보창구, 기타 다양한 지원활동을 담당했고 현재 한국융연구원을 나와 분석가 자격을 획득한 이문성 선생이 한국분석심리학회 회장으로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한국융분석가협회의 발족 (2003)

2003년 10월 한국융분석가협회 KAJA The Korean Association of Jungian Analysts 가 창립되고 2004년 8월 국제분석심리학회에 정식 가입하였다. KAJA의 임원 역시 학회나 한국융연구원의 임원과 같았고 다만 맡은 부서와 책임이 다를 뿐이었다. 한국분석심리학회가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기타 국내 전문가, 일반 대중과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한국융분석가협회는 국제학회와의 연결고리인 셈이었다. 나는 한국융분석가협회의 창립회장으로 우선 한국융연구원의 분석가 수련을 국제학회에서 공인받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국제학회에 단체로 가입했으면 다음에는 수련단체 Training Group으로 인정받는 것이 상례이었다. 그런데 그러자면 최소한 10명 이상의 국제학회 정회원이 있어야 했다. 2007 년 여름에 그 수가 11명이 됨과 동시에 한국융분석가협회는 수련그룹으로 국제학회의 인정을 받았다. 이로써 국제학회에서 공인된 수련계획에 따른 한국융연구원의 수련을 마친 사람은 국제학회의 별도 심사 없이 한국융분석가협회를 통하여 국제분석심리학회 정회원으로 등록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사라면 경사이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지만 그동안 우리의 수련계획을 국제학회 심사위원회로부터 심사받는 과정은 반드시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핵심적인 몇 가지 면에서 심사위원들은 내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면(아마도 소홀히 하고 있는 면)을 깐깐한 질문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면은 무시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교육분석가의 결정권을 약화나 무력화시키려 한 것이다. 대체로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개인 사이의 신뢰보다 집단적인 평가를 도입함으로써 ‘합리적 객관적 민주적 행정적 처리’를 표방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관료주의처럼 여겨졌다. 취리히의 융 연구소가 규모가 커져서 퀴스나하트로 옮기면서 도입한 각종 규제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우리 연구원도 앞으로는 지금보다 커질 것이고 이런 관료주의는 어쩌면 우리가 고려해야 할 우리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참고 받아들였다.(25) 만족할 만한 타결이 이루어졌을 때 나는 심사위원장에게 감사의 뜻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문화체험이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앤케이스먼 여사가 이 말을 이해했는지 나는 모른다. 양자 사이의 견해 차이가 서양 근대의 지적 합리적 완벽주의와 동양의 주관적 직관 사이의 갈등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국융분석가협회가 국제학회에 처음 가입할 때에도 우리는 그런 이문화 체험을 해야 했다. 윤리규정을 어찌나 깐깐하게 따지는지 우리는 우리의 논리적 합리적 귀결 능력과 개인의 인권에 관한 무지, 법률적 지식의 빈곤 앞에서 당황했다. 일본학회가 가입할 때도 무척 고생했다고 하니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우리의 윤리규정을 장식하는 모두의 대강령 격인 노자와 융의 인용에 대해서는 윤리위원장이 공석에서 공감을 표시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엄밀히 따진다면 당신네 윤리규정은 보완할 게 많다는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윤리규정은 서두에 인용한 노자와 융의 말이 담고 있는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분석가 수련 자격기준에서 고려할

분석가 수련에서 중요한 것은 분석가의 수보다도 그 자질이다. 자질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기준은 경험의 길이와 깊이이다. 5년 경력 10명보다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분석가가 5명 있으면 최소 2명의 수련자를 키울 수 있다고 본다. 분석가 수가 적으면 수련자의 수를 그것에 맞게 조절하면 된다. 국제학회의 기준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한국융분석가협회의 창립회장으로 국제학회 가입이나 격상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분석가 자신의 연수였다. 사실 분석가 수련에 관해서는 국제학회의 훈수를 안 받아도 자신이 있었고 꼭 외부적인 페르소나를 가꾸는 일에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분석가끼리의 모임이 결성된 이상 이 모임은 한국분석심리학회나 한국융연구원과는 다른 역할을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우선 분석가 자신의 발전을 위한 발표와 토론의 기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정기적으로 모여서 사례발표나 연구계획 또는 흥미 있는 주제를 번갈아 가며 발표하기로 하고 몇 번 모여서 토론과 식사를 즐겼다. 그런데 이런 취지가 아직 큰 공감을 못 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5. 분석심리학 분야의 연구활동

한국에서의 분석심리학 분야 연구활동에 관하여는 학회 30 년사와 한국융연구원 10년사에 나와 있는 바와 같다.(26) 여기서는 다만 나의 생각을 간단히 피력하고자 한다.

경험심리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여러 학파를 대변하는 의학심리학의 연구는 무엇보다도 사례분석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방법은 주관적 경험적, 현상학적인 것이다. 리서치research라고 하면 통계적 타당성을 내세우고 일체의 주관성을 배제하는 자연과학과 그와 맥을 같이 하는 대학심리학을 연상하지만 이것으로는 임상현장에서 관찰되는 생생한 영혼의 울림을 기술하고 그 경험을 음미할 수 없다. 기계가 아닌 심혼을 지닌 인간을 다루는 의학이라면 반드시 사례연구와 같은 주관적 경험적 연구를 장려해야 한다. 의학에 인문학이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의과대학 학생에게 시를 가르치거나 철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문학적인 태도와 관점을 길러주는 데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의학의 오랜 전통이었던 관찰과 숙고의 태도를 존중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관찰자의 주관이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사례분석, 융의 조발성 치매환자를 중심으로 한 심리학적 해석, 빈스방거의 정신분열증 사례의 분석, 역사에 남는 이 업적들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이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대학에서 논문을 지도하면서 나는 늘 이런 점 때문에 불편했다. 그래도 나 자신은 대부분 쓰고 싶은 논문을 발표해 왔다. 그러나 때로는 통계적인 논문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연구는 물론 분석심리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문계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가 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일종의 화학반응 같은 것이 곧 나의 연구 업적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분석심리학과 정신치료 분야뿐 아니라 정신병리학, 사회 및 문화 정신의학, 정신의학사, 행동의학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실 어느 것을 다루든 분석심리학은 사물을 보는 하나의 관점으로 매우 유익했다.

나 개인의 분석심리학 관련 분야의 연구(27)를 장황하게 소개할 필요는 없겠으나 역사적으로 개관하면 샤머니즘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기층문화에 대한 심층적 탐구가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승문화에서 볼 수 있는 질병관, 민간치료 속에서, 혹은 신화민담과 같은 구비 전승 속에서 인간 무의식의 원형적 상징을 발견하는 작업이었다. 이런 작업은 필연적으로 한국인 심성의 특성을 살피는 일이기도 했는데 나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 보편의 집단적 무의식의 표현을 보고자 했다. 일본인 분석가들이 무엇보다도 일본 문화의 독특성을 찾으려 하는 것과는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폰 프란츠의 권고에 따라 중국의 연금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동양의학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논문을 발표하였다. 차츰 전통사상으로 분야를 확대하여 논어에 나타난 인격론, 공자의 天命관, 퇴계의 천명도, 원효의 一心, 唯識과 분석심리학의 정신구조, 그리고 노자 도덕경에 관한 분석심리학적 해석 등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전통사상 속의 무궁한 지혜를 현대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간절한 소망에서 나온 것으로 큰 공부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환자, 또는 피분석자들의 꿈, 그림, 이른바 병적 체험 내용 등 무의식의 표현에서 융의 원형학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이런 연구는 환자를 전체로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제공한다. 병적인 것 속에 숨은 창조적인 것, 치유의 싹을 볼 줄 아는 의사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환자의 숨은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융의 연상검사와 심리학적 유형검사의 고전인 Gray Wheelwright Test와 정신병리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연병길 선생과 함께 시도해 보았는데 별로 크게 만족할만한 결과는 얻지 못했다. 연상검사는 1976년 한국인 대학생에 대한 예비연구로 이철 선생과 함께 시작하였고 1995년에는 서국희 선생과 함께 그 축약형을 만들고 스위스의 경우와 비교하는 등 문화적인 면까지 다루었는데 근년 신용욱 선생의 학습과 관련된 실험적 연구가 영국에서 간행되는 분석심리학 저널에 실려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심리학적 유형검사 중 가장 늦게 나온 Singer Loomis Inventory는 한오수 교수와 함께 한국융연구원 전문과정에 있는 박효인 박사가 꾸준히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있다.

한국분석심리학계의 연구의 특징을 굳이 말하라면 대체로 한국 전통사상의 분석심리학적 연구라 할 것이다. 이죽내 선생은 화두선으로 융 연구소 졸업논문을, 융과 상징적 이해라는 논문으로 취리히대학 대학원 심리학과 학위논문을 쓴 이래 중용, 장자, 원효사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2005년 ‘동양사상과 분석심리학’이라는 역저를 냈다. 이유경 선생은 천도교의 창건 체험을 주제로 융 연구소의 졸업논문을 썼는데 신화학과 분석심리학의 관계에 관한 학위논문을 책으로 펴냈으며 동서 연금술에 관한 글을 활발히 발표하고 있다. 이보섭 선생은 샤머니즘의 상징에 관한 논문을 융 연구소의 졸업논문으로 썼고 계속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서동혁 선생은 불교 유식학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고 불교 정신치료에 관심이 많다. 선불교에 관해서는 또한 이문성 선생의 한국융연구원 졸업논문이 있는데 융의 선불교에 대한 견해의 역사적 배경을 지적한 좋은 논문이다. 이나미 선생은 공자의 꿈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고 우리나라 신화의 여성 신에 관한 흥미로운 논문을 뉴욕 융 수련센터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여 수리되었다. 또한 이도희 선생은 한국융연구원 졸업논문으로 전통 喪, 葬禮의 상징성이라는 흥미 있는 연구를 발표하고 있다. 박현순 선생은 한국융연구원 졸업논문으로 황진이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는 좀 다른 방향으로 한오수 선생은 취리히 융 연구소의 수료논문으로 단군신화를 주제로 삼았었는데 근년 종교와 치유의 문제와 신의 관념, 신비 체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스위스 심층심리학 연구소를 나온 분석가인 심상영 박사는 목회상담가답게 성경의 상징연구에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임상사례와 연계하여 정신치료에서 흔히 우리가 부딪치는 부성 콤플렉스, 아들의 모성 콤플렉스, 딸의 모성 콤플렉스에 대한 고찰이 박신, 강철중의 한국융연구원 졸업논문으로 발표되어 이 방면의 지견을 넓혀주었으며 김계희 선생은 딸의 모성 콤플렉스에 대한 야심 찬 졸업논문을 제출하고 있다. 졸업논문이란 물론 시작에 불과하고 많은 반론과 비판의 세례를 거쳐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될 터이지만 나는 한국의 융기언들이 시작한 일을 계속 갈고 닦아서 좋은 성과를 이루기를 바라고 있다.

분석심리학의 연구가 우리나라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것은 없다. 연구도 진료나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의식 무의식에 따른 결단에 좇을 뿐이다. 연구논문을 많이 쓴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논문은 별로 많지 않지만 그 논문의 질이 매우 알차고 임상에서는 훌륭한 치료자인 경우가 융 학파 분석가 사이에는 많다. 다만 강조할 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문화유산 속에는 아직도 발굴해야 할 보배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항상 유의해야 할 것은 분석심리학이 인문학, 또는 사회학의 자료를 대상으로 연구한다고 해서 인문학이나 사회학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민담을 문학연구의 목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또 방대한 상징사적 자료를 상징학의 연구를 위해서만 섭렵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목적은 그 모든 현상 속에 반영된 인간 무의식의 표상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며, 우리가 매일매일 보고 있는 환자의 무의식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또한 그럼으로써 이들을 온전하게 치료하는 데 있다.

분석심리학자는 생물학적 연구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생각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바람직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작금의 눈부신 발전으로 뇌와 몸의 비밀이 많이 밝혀졌지만 뇌와 몸은 여전히 커다란 무의식이다. 신경생물학은 이 무의식에도 전하고 있고 심층심리학이 그 작업에 기여할 여지가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융의 비인과적 동시성론은 이 방면의 접근법과 관점을 변화시키고 확대시키는데 이바지할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인 직관이 발견한 것들이 여러 해 뒤에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융 학파 분석가이면서 정신과 의사 사이에 그런 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번역사

융의 저작의 번역은 융을 알리는 데 있어서나 융을 공부하는데 중요한 작업 중의 하나였다. 융에 관한 나의 최초의 번역은 1980년 다른 것과 함께 출간된 융의 ‘현대의 신화’였다. 삼성출판사에서 세계사상 전집의 하나로 낸 것인데 해설과 융에 대한 소개까지 되어있었지만 슈바이처와 함께 묶어서 내는 등 별로 알려지지 않은 글이다. 그렇게 된 데는 나의 잘못도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당시에 융이 유행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최초의 번역을 융의 만년의, 비교적 어려운 저작으로 택했다. 이 책은 사실 비행접시 현상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에 내용을 모르고 제목만 본 사람은 충분히 흥미를 끌만 한 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미확인 비행체 UFO를 독일어 발음 그대로 우포라고 번역했다. 최근에 이 책을 다시 살리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한국분석심리학회 회원이 합동으로 처음 번역한 책이 1983년 집문당에서 나온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이다. 나와 6명의 회원이 열심히 번역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최근에 전반적인 번역의 교정을 진행 중이다.

1985년 1월 **일 날짜로 취리히에 있는 C. G. Jung의 유산관리재단 Niedieck Linder AG 대표, Gerda Niedieck 여사는 융의 가족과 유산관리재단이 한국에서 출판되는 융의 모든 저작은 예외 없이 한국분석심리학회(회장 이부영)의 번역으로 나와야 하며 법이 허용하는 한 우리의 번역 작업을 지원할 것이라는 내용의 각서를 내게 건네주었다. 한국분석심리학회장으로서 내가 여러 경로로 -아마도 폰 프란츠의 소개로- 니덱 여사를 소개받고 취리히에서 만나서 우리 학회의 성격과 구성원의 교육 배경 등을 설명하고 번역 의지를 표명한 데 대한 공식 회답이었다.

최근에는 한국융연구원이 폰 프란츠 전집의 번역 및 출판권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도록 취리히의 재단 이사장 에터 박사의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이고 한국융연구원 폰 프란츠 저작번역위원회(위원장 한오수 교수)가 이미 부분적으로 번역을 진행하고 있다. 이 전집의 국내 출판과 보급은 솔출판사에 위탁하기로 정해놓은 상태이다.

아니엘라야페가 편찬한 융의 자전적 회상: C 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은 야페 여사의 허락을 얻어 내가 독일어에서 직접 번역한 것인데 집문당에서 1989년 출간되었다. 내 자신이 감명을 받은 책이었기 때문에 애착이 가는 책이다. 그 뒤에 여러 분석심리학 책이 번역 출간되었는데 무엇보다 특기할 일은 스위스 발터출판사에서 나온 CG JUNG Grundwerk 융 기본저작집 9권을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융연구원 번역위원회 번역으로 솔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읽는 사람은 단숨에 읽고 어렵다느니 번역이 딱딱하다느니 하지만 그 책에는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배어있다. 그 책은 새빨갛게 고친 교정지를 옮기고 또 고치고 옮기는 나의 감수작업과 깨알 같은 내 글씨를 용케 알아보고 인내력 있게 필사를 거듭한 나의 비서 전영희 씨의 숨은 노고와 철저하고 엄격한 교정으로 믿음을 준 출판사의 전수련 씨, 그리고 항상 겸손했으나 라틴, 그리스어, 프랑스어 등의 감수를 착실하게 해준 변규룡 박사, 그 밖의 많은 이의 손길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6. 전망과 과제

지금까지 나는 분석심리학이 이 땅에 들어온 뒤 발전해 온 과정을 개괄적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것도 주로 한국분석심리학회 창립회장으로서 내가 해온 일, 내가 겪은 일을 중심으로 회상하였다. 쓰다 보니 내가 만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 적은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작업, 글을 다시 읽고 고치는 과정은 나로서는 유익한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글이 독자, 특히 후학들에게도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기를 바란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이고 과거의 교훈은 미래를 짊어질 사람들에게 그래도 유익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또한 분석심리학에 관한 나의 신념과 분석심리학계의 있어야 할 좌표, 기본 관점에 대하여. 또한 한국의 융 분석가들이 추구해야 할 융의 기본정신에 관하여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나의 생각과 신념, 결정이 다 옳은 것이어서 모두 그대로 따르라고 요구할 권리는 나에게 없고 또한 그러는 것이 온당한 일도 아니다. 미래를 개척하는 것은 결국 각 개인이기 때문에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라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다. 다만 그런 개인적인 판단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참고가 된다면 다행이겠다.

미래는 모르는 것, 그 또한 무의식이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 그러나 만들어 가다가 뜻대로 안 되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최선을 다했다면 그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자아보다 더 큰 ‘자기’가 어떤 방향으로 지렛대를 돌릴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구상이란 희망이며 소원이지 절대적으로 보증된 약속도, 꼭 지켜야 할 고정목표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래를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미래를 위해서 단체나 기구가 해야 할 역할은 개인이 열심히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 한국의 고질병을 타파하고 ‘무엇을 하게 하는’ 열린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리라. 나부터 이를 행하도록 노력할 작정이다. 그런데 교육에는 억제와 장려의 두 수레바퀴가 있게 마련이니 무엇이든지 다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조화의 묘가 필요할 것이다.

한국융연구원을 금융 연구원이라 하고 융단 연구하는 곳으로 착각하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융의 이름은 여전히 대중에겐 낯설다. 그러나 30년 전과 비교할 때 분석심리학은 그동안 사치스러워졌다고 할 정도로 넉넉한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고 또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융의 심리학은 교양인의 언어로 등장하고 있고 많은 영상매체의 아이디어로 응용되고 있다.

유행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의료전문가들보다 의료의 주변에서 작업하던 사람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의욕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큰 공명을 얻으며 확산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 정상적인 분석가든 등록되지 않은 자칭 융기언이든 사람을 모셔다가 열심히 공부들을 하고 있다. 남을 치료하는 사람은 교육분석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이론으로는 많이들 알고 있고 실제로 분석을 받는 사람도 많이 늘어났다. 문제는 이렇게 ‘조금 아는 사람’ 가운데 성급하게 치료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고 이미 융기언임을 자처하는 사람도 생겼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융의 이름을 빙자한 선무당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발전과정의 있을 수 있는 부작용이라고 내버려 두기에는 우려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들에 대한 대책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惡貨를 쫓아다니면서 물리치려 하기보다는 良貨를 잘 기르는 것, 그래서 악화에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면역력, 건강한 힘을 길러주는 것이 최상의 대책임을 나는 알고 있다. 분석심리학이든 어떤 의학심리학이든 인간을 건강케 하는 심리학에 목말라 하는 일반 사람들과 정신치료에 큰 관심이 있으면서도 전문가 수련의 특수성 때문에 항상 멀게만 느껴온 전문직 사람들의 갈증을 축여줄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제공하는데 앞으로 더욱 힘을 기울일 것이다.

7, 8년 안에 한국에는 10명 내외의 융 학파 분석가가 더 배출될 것이다. 그리되면 우리나라에 20명이 넘는 융 학파의 분석가들이 있게 된다. 이것은 벌써 적지 않은 숫자이다. 분석가 자신의 연수가 필요해질 것이고 한국융분석가협회가 이 일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협회가 커지면 한국분석심리학회와의 역할분담을 다시 의논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신경정신의학회와의 관계를 어떻든 유지해야 할 한국의 현실로 미루어 보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한국분석심리학회와 한국융분석가협회는 한국융연구원을 중심으로 뭉친 3두 마차였고 지금도 미래도 그렇게 남을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왜 새로운 단체를 만들면서 옛 단체를 해체하지 않는가 하고.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세 기관의 역할이 각기 다르면서도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 주체는 하나, ‘국제학회 회원 및 이와 동등한 자’이다. 이것은 한국분석심리학회 창립 시부터 내려오는 원칙이다. 정신치료나 이에 대한 수련교육은 정신치료의 수련을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원칙은 당연히 융 학파의 모든 수련과 교육 그리고 분석상담에 적용된다. 다만 교양과 문화의 창달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겠는지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우선은 한국융연구원 기획, 한국분석심리학회 주관의 공개강좌를 늘려갈 예정이다.

작년에 국제학회 차기 회장으로 피선된 죠 켐브레이가 방한했을 때 나에게 한국의 분석심리학이 장차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물은 일이 있다. 나는 그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히 묻지 않은 채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국의 융기언이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말하곤 나도 놀랐다. 그 당시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기존 연구소가 갈라지고 반목하고 새 수련센터를 만들고 그것을 또 국제학회가 인정해 주고 하는 현상이 유난히 눈에 띄었었다. 그것은 마치 로마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린 뒤 수많은 분파로 갈라진 서구 개신교의 분열상을 보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여기에는 대외적인 경제적 요인도 개입한다. 그리고 교육이념의 차이도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영웅심, 내가 좀 더 잘할 수 있다는 영웅심, 혹은 고집과 오만의 충돌도 관여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물론 도저히 치유될 가망이 없으면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퀴스나하트의 융 연구소가 융의 기본정신을 너무도 훼손하여 떠날 수밖에 없었던 폰 프란츠와 그 제자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들의 분리독립은 영웅심과는 거리가 멀다. 무의식의 깊은 의도를 신중히 살피고 난 전체 정신의 결단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나는 그 배경을 생전의 폰 프란츠에게서 들어 알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분석가의 수가 많지 않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수련센터가 운영되는 동안은 별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년 30년 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나의 소망은 분석가 각자가 각기 자기의 터전에서 일하면서도 분석가의 수련은 지금처럼 한국융연구원에서 함께 도와가며 착실하게 해나갔으면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석심리학을 ‘바르게’ 교육하려는 우리의 목표이며 의지이다. 그것은 인간 정신을 자아중심적 ego-centered 관점이 아니고 자기중심적 self-centered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 즉, 의식 중심이 아니고 무의식을 포함한 전체 정신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자세를 기르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무의식의 창조적 의도에 대한 경험적 성찰을 통해서 터득될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우리는 10년을 아니 30년을 함께 일해왔다. 앞으로도 이러한 기본 태도 아래서 여러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양성 속의 단일성’이라는 동양의 오랜 전통적 지혜가 있다. 발전을 위해 대극의 갈등을 전제로 하는 서양 근대의 변증법적 발전모델을 굳이 우리가 답습할 필요가 없다.

다른 학파와의 관계에 대해서 분석심리학은 본래 열린 자세를 가져왔다. 이것은 융 자신의 기본 태도였다. 우리는 융의 이론으로 인간 정신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또한 모든 환자를 치료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실로 다양하며, 그 심성의 비밀은 아직 다 밝혀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치료방법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정신치료의 바탕이 될 심리학은 그러므로 다양해야 하며, 많은 학파가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28) 나는 우리나라에 통찰 정신요법 분야의 학파다운 학파가 좀 더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정신분석학계의 꾸준한 노력과 공부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좋은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학파 간의 이론상의, 혹은 실지 사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토론은 학문의 발전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비판은 환영할만한 치료제이다. 그러나 ‘비판’이 아닌 악의적인 인신공격성 ‘비방’은 상호 간에 무의미한, 혹은 해로운 독약이다. 불행히도 이 세상에는 유명한 사람을 깊은 사려 없이 깎아내리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더러 있는 것 같다.

정신치료 이론은 경험적인 토대 위에서 나왔지만 자칫 도그마가 되기 쉽다. 치료자는 자기가 배운 것이 최상의 것이라고 믿게 되고 또 그래야만 치료 효과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러는 가운데 나만이 옳고 남이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성숙한 치료자가 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내가 늘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의과대학이나 정신과 전공의의 정신치료 교육에서 일부를 제외하곤 정신분석 이론이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교육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간 심성의 이해를 인과적 환원적 입장과 병리적 측면에서만 보는 법을 가르치는 결과를 빚게 된다. 건강개념에서 영성적 요소의 중요성이 세계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마당에, 또한 인간을 전체로 보아야 한다는 정신치료의 대원칙을 일찍부터 알고 있는 정신의학이 인과론 못지않게 중요한 목적론과 건강한 인간 심성의 창조성을 무시하고 어떻게 온전히 정신치료 교육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분석심리학과 인간주의 심리학은 그런 의미에서 정신과 교과서에서 정신분석과 함께 충분히 소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고대 그리스 의학의 거장 갈레노스의 해부학은 부정확한 것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교수들은 그 권위를 신봉하는 나머지 시체 해부를 하면서도 갈레노스의 해부학에 있는 것만 보고 그 밖의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천 년을 그런 식으로 교육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비단 정신분석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한 학설의 도그마화를 방지하려면 학문과 교육의 현장에서 모든 학파의 학설이 개방되고 자유로운 선택과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식의 생산과 보급을 담당하는 대학의 역할은 바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배울 기회를 주는 데 있다. 그것도 정신 의료가 날로 규격화, 상업화되고, 의료의 질보다는 수량에 치우치고 있는 현실에서 대학병원이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시류를 앞장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치료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고 또한 그 모범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융 학파를 비롯해서 심층심리학파의 수련을 원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열린 마음을 갖는 일이다. 대학과 학회, 대학과 민간연구소와의 협동은 여러모로 유익한 점이 많다. 한국분석심리학회나 한국융연구원은 글자 그대로 한국의 학회, 한국의 연구원이다. 어느 한 대학의, 혹은 한 직종의 사람만을 위한 연구 및 수련기관이 아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체험을 전수할 준비가 되어있다. 무엇을 주저하는가.

이 글을 마감하면서 드는 느낌은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또한 나와 함께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이 길을 함께 걸어오면서 고락을 같이 한 나의 道伴들에게도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또한 국내외에서 보내준 충정 어린 고언과 충고에 무엇보다도 감사하며 앞으로도 계속 편달해주기를 바란다.

미주

1. 이부영: 나의 융 연구소 수학 시절, 심성연구 2(1): 53-72,1987 참조
2.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의 구건물 의국에 있던 도서 가운데서 현재 확실히 남아있는 융 관계 책은 C. G. Jung: Über die psychische Energetik der Seele, Rascher Verlag, Zürich, 1928 과융의논문 Ziele der Psychotherapie가 들어있는 학회논문집 Bericht des allgemeinen ärztlichen Kongresses füur Psychotherapie 이다. 프로이트 전집의 존재는 유석진 선생의 증언에 의한다. 한국 근대정신의학의 역사적 조명, 서울의대 정신의학 14:1,1-35
3. 황패강 : 한국 서사문학 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서울, 1972.
4. 이부영: 소위 강신적 입무과정의 정신의학적연구, 명주완 박사 환력기념논문집 2, 서울대의대 신경정신과학교실, 1965, 1-26. 융의 일본 역서는 1956/57 일본敎文社발행 융 저작집 4권,
5. 이부영: 정신분열병의 현대적 해석-주로 현존재분석의 입장에서, 최신의학 4(8) 981-984
6. C. G. Jung Institut Zürich : Studien zur analytischen Psychologie C. G. Jungs, 1, Band , 2.Band, Rascher Verlag, Zürich, 1955.
7. 이부영: 한국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의 심리학적 제 문제’, 명주완 박사 환력기념논문집 1,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 1965, 21-36
8. 선택과정: 분석심리학의 이론과 실제, 의대 4학년, 1982-1992
9.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이부영 교수 정년퇴임기념 논제집, 1997 참조.
10. Rhi, Bou-Yong, Analysis in Korea with the special reference to the question of success and failure of analysis. In G. Adler (ed.) Success and Failure in Analysis, G.P. Putnam ‘s Sons, New York, 1974, 136=143.
11. 이부영, 한오수, 이인수, 정신요법 중 단례에 관한 고찰-수련의의 정신요법을 중심으로, 신경정신의학 13(2) 219-228.
12. Rhi, Bou-Yong, East-West communication from the viewpoint of analytical psychology, 문화인류학, 5:235-253.
13. 1972년부터 ‘문학사상’지에 연재를 시작하였다.
14. 이부영: 한국인 피분석자의 꿈에 나타난 갈등의 양상과 그 해결, 신경정신의학, 14(3):276-287.
15. 이부영: 분석심리학-C. G. Jung의 인간심성론, 일조각, 서울, 1978, 개정증보판, 1998.,이부영: 분석심리학의 탐구1, 2, 3, 한길사, 1999-2002. 좀 이해하기 쉬운 책으로 이부영 박사의 정신건강이야기, 정우사중제1부.
16. 이부영: 나의 융 연구소 수학 시절 심성연구 2(1) 1987,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여사를 추모하며, 심성연구 13(1): 54-58, 1998
17.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신경정신의학사 편찬위원회(편) 학회 활동을 돌아보며, 1992:82-93
18. 심성연구 창간호, 1986, 117-120.
19. 이부영: 심성의 탐구를 위하여, 심성연구 창간호 3-4, 1986, 창간사.
20. 나치의 유대인 학살 만행을 겪은 사람들이 융이 베를린에 본부를 두고 나치 선전상 괴린의 동생이 그 임원의 한 사람이었던 국제정신치료의사회의 회장직을 전 회장 크레취머의 간청으로 맡은 일 때문에 일부 유대인으로부터 적대시된 정황을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융을 반유대주의자라느니 친 나치주의자라느니 하며 그를 비난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융은 오히려 그 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유대인의 탈출을 도왔으며, 그의 제자 가운데는 유대인 제자가 적지 않다. 이부영: 분석심리학, 1998, 16-17. M. L. von Franz, C. G. Jung, Verlag Huber, Frsuenfeld, 79-82.
21. Rhi, Bou-Yong, Heaven’s Decree, Confucian contributions to individuation, The Transcendent Function, Individual and Collective Aspects(ed. M. Mattoon), Daimon Verlag, Einsiedeln.
22. 가와이 교수는 1982년 ‘옛날이야기와 일본인의 마음’이라는 저서를 출간하였고 나는 1965년부터 발표해 온 민담해석을 모아 1995년 집문당에서 발간할 때 책의 이름을 ‘한국민담의 심층분석’이라고 붙였다. 가와이 교수의 같은 책의 영역서의 제목은 이보다 더 확실하게 일본인의 심성 Japanese Psyche, Major Motifs in the Fairy Tales of Japan으로 되어있다. 자기실현에 관한 두 사람의 발표는 Psyche, Vol. 10, 1991, Japan Jung Club참조, 또한 이부영: 동방문화에서의 융 심리학의 과제 (일어), Psyche 1991, 앞의 책과 동방문화와 분석심리학- C. G. Jung의 문화체험 양식과 관련하여, 심성연구 6 (1, 2), 1991 1-16 참조.
23. 1987년에서 2008년 2월까지의 분석심리학회의 활동은 ‘한국분석심리학회 30년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24. 한국융연구원 개설과 개원과정에 관하여는 ‘한국융연구원 10년사’를 참조.
25. 국제학회에서 공인된 한국융분석가협회의 수련규정은 ‘한국융연구원 2008’에서 볼 수 있다.
26. 한국분석심리학회 30년사, 한국융연구원 10년사 참조.
27. 이부영 교수 정년퇴임기념 논제집, 앞의 책, 나의 학문의 길- 하나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 철학과 현실 1990, 여름, 277-290; Rhi, Bou-Yong, Encounter with the West-from my life and works, Journal of Religion and Health 35(4) 337-341.
28. 이부영: 분석심리학 개정증보판, 1998. 237-249, 정신치료에 관한 장 참조.

참고문헌

1. 이부영: 나의 융 연구소 수학 시절, 심성연구 2(1): 53-72, 1987
2.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이부영 교수 정년퇴임기념 논제집, 1997
3. 한국융연구원 10년사, 2008
4. 이부영: 나의 학문의 길 – 하나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하여, 철학과 현실 1990 여름, 277-290
5. Rhi, Bou-Yong, Encounter with the West-from my life and works, Journal of Religion and Health 35(4) 337-341.
6. 한국분석심리학회 30년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