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기행(紀行)
김성민(융학파분석가, 라피스분석심리학연구소)
souyou67@hanmail.net
지난 여름에 프랑스에 갔던 것은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지낼 때의 마음은 그 전과 사뭇 달랐다. 최근에 갔던 지난 2007년에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이 있어서 과제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연구년 기간 동안 수료 논문을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편하지 못 했지만, 이번에는 정년퇴직을 한 다음이라서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빠리 시내나 내가 공부를 했던 스트라 스부르 시내를 돌아다닐 때는 물론 오르세 미술관이나 로댕 미술관 등에서도 그 전에 보지 못했 거나 스쳐 지나갔던 것들이나 그 전에 보았던 유명한 작품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 앞에서 “아, 아 이런 작품이 있었나?” 하거나 “아, 여기 이런 것이 있었나?” 하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같이 간 아내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스트라스부르 시내에 있는 어떤 건물은 틀림 없이 내가 공부했던 1980년대 중반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던 것인데,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 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여보, 당신 저 건물 위에 있는 저 조각상을 그때 보았어?” “아니, 저게 그때도 있었나?” 그 건물을 새로 짓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때도 있었을 테고, 새로 조각을 했다면 건물의 색깔과 조각의 색깔이 차이가 났을 텐데 그때 그냥 지나쳐버린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 던 것이다. 아마 그때는 매일 무엇엔가 쫓기는 것처럼 살았고, 시내를 다닐 때도 종종 걸음으로 다녀서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 없이 편하게 걸으니까 그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이나 기억은 정말 아주 주관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절실하게 느껴 졌다. 그러나 그런 것이 비단 이 경우에만 있는 것이랴! 우리가 보는 세상과 사람들은 물론 나 자 신도 얼마나 내가 그때그때 다르게 보고, 느끼는 것이랴! 그럼으로써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을 다 르게 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10년 만에 다시 찾은 프랑스에는 실제로 변한 것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 변화를 제일 처음 느낀 것은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였다. 그리고 내용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여유가 많이 없어 졌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내가 샤를르 드골공항에서 자동차를 빌려서 빠리 외곽순환도로에 들어섰 을 때 절실하게 몸으로 다가왔다. 내가 유학을 했던 1980년대나 지난 2007년에 왔을 때 프랑스 사람들은 여유 있게 운전을 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프랑스 사람들은 상대방이 좀 서툴게 운전한다고 생각되면 자기 쪽에서 배려하면서 기다려주거나, 동네의 골목에서는 운전이 서툴렀던 나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을 했는데 이번에는 지형지물에 아주 낯선 외국인이 서 투르게 운전하니까 사정없이 끼어들거나 경적을 울려 대서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프랑스 사람들 이 사납게 변한 것이다.
또 하나 달라진 것은 빠리 시내와 스트라스부르에 24시간 동안 여는 가게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그 전에는 가게들이 보통 평일에는 오후7시까지만 열고, 토요일에는 반나절만 열며, 일요 일에는 하루 종일 문을 닫아서 주말에 도착하면 그 다음날 아침에 먹을 빵을 사지 못해서 쩔쩔 맸는데 이제는 24시간 동안 내내 열거나 일주일 내내 문을 닫지 않는 가게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이제는 오후7시 이후에 프랑스에 도착하거나 주말에 도착해도 옛날 같이 낭패를 보지는 않게 되 었지만 그것도 이곳의 삶이 빡빡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씁쓸한 느낌이 들었 다. 프랑스만이라도 온 세계를 휘젓고 있는 세계화라는 무한 경쟁 체제, 신자유주의라는 야수(野 獸)의 멘털리티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모습을 잃지 않기를 내가 너무 바라는 것일까?
그러나 며칠이 지나다보니 처음에 받았던 인상과 달리 프랑스의 속살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그 전과 달리 샹젤리제나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 같은 유명한 관광지보다 여기 저기 빠리의 골목길들을 더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 골목들이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언뜻 언 뜻 비쳐지는 골목들처럼 정겨웠다. 그 골목들에는 아직도 구둣방들과 옷 수선 가게들과 책방, 목 공소, 열쇠 고치는 집, 빵집들이 그대로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 빵을 사러갈 때 보 면 열린 문틈 사이로 햇살이 들어가서 대패에 깎인 나무 먼지들이 공중에 떠다니는 것들과 발재 봉틀에 앉아서 발을 구르면서 옷을 박는 여인들이 있었고, 빵가게 아가씨들의 낭랑한 인사 소리는 빠리를 여전히 빠리로 느껴지게 하였다. 발자크 소설이나 모파상의 소설에 나오는 가난한 서민들 은 아직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빠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빠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곳곳에 예쁜 것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시 자체가 사 람들이 걸어 다니기 좋게 만들었다는 점에도 있을 것이다. 빠리에서는 우리나라에서처럼 차도와 인도의 높이 차이가 그렇게 많지 않고, 웬만한 거리는 차를 타지 않고 갈 수 있어서 좋다. 더구나 길모퉁이 마다 빨간 차양을 단 까페들과 6층, 7층으로 스카이라인을 맞춘 하얀 대리석 건물들, 발 코니마다 붉은색, 분홍색, 하얀색 제라늄들이 색깔을 맞춰가면서 피어있는 것들을 보노라면 한 두 블록은 금방 지나치게 되는데, 그 바람에 나중에 집에 가면 다리가 아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 다. 또한 세느 강변은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어서, 낮이나 저녁이나 사람들 로 흘러넘친다. 강가에서 싸가지고 온 샌드위치를 먹거나 더위를 식히는데, 강바람이 그만인 것이 다. 더구나 밤이 되면 사람들은 포도주나 맥주를 들고 강변에 나가서 여름밤을 보내는데, 그것 또 한 빠리를 즐기는 중요한 팁 가운데 하나이다. 나도 잠시 빠리지앙이 된 양 아내와 함께 두어 번 포도주를 들고 강바람을 쏘였는데, 어느 날 밤 세느 강가에 달렸던 가녀린 초승달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빠리에서 잠시 얻은 집은 바스띠유 광장 근처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멀지 않은 쉴리 다리 (Pont de Sully) 아래에서는 젊은이들이 매일 저녁 춤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 무도회(舞蹈會) 에는 세느 강변에 그날 저녁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서 빠리에 처음 온 전 세계 의 젊은이들이 빠리지앙, 빠리지앤느들과 어울려 춤을 추면서 밤을 지샌다. 멀리서 바라봐도 그렇 게 신날 수 없었다. 나도 지금보다 20-30년 더 젊었으면 저 자리에 끼어서 같이 손을 잡고 춤을 출 수 있었을 텐데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빠리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산책을 하거나 강변에 서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것은 도로 구조가 시내 어디에서나 세느 강변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 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빠리 행정이 사람을 위주로 편성되어 있으며, 빠리가 모든 사람 들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관(官) 주도로 하거나 효율성과 실용성 위주 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을 즐길 수 있게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와 연장선상에서 스트라스부르 대학가의 도로가 생각난다. 그곳은 내가 살던 때 대학가의 중 심 도로이고, 왕복 4차로여서 차들이 질주하고 다녔는데 지금은 왕복 2차로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 대신 나머지 공간은 자전거 도로, 녹지, 주차공간으로 되어서 이제는 한적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스트라스부르의 도로들은—프랑스의 다른 도시들도 그렇지만—10년 동안 상당히 많 은 곳에서 일방통행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눈앞에 빤히 보이는 곳에 가려고 해도 시내를 빙빙 돌 아가야 했고, 그 전에 잘 알던 곳일수록 도로 체계가 달라지는 바람에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 러나 그렇게 바뀐 것이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서는 운전 자가 속도만 내지 않고—속도를 낼 수도 없지만—교통신호만 제대로 지키면 사고가 거의 나지 않 게 된 것이다. 운전을 할수록 “정말 사람이 잘 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구나.” 하는 느낌이 온 몸으로 전해져 왔다. “세상에, 도로를 넓혀도 시원치 않을 판에 도로를 일부러 좁혀 놓다니!” 하 는 생각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러니 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프랑스에 와서는 기관지가 약한 내 가 그 전보다 기침을 훨씬 덜 하는 것 같았다. 공기가 그 전보다 훨씬 깨끗해졌기 때문이리라.
같은 맥락에서 든 생각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종종 빠리가 좋다고 해서 갔는데 빠리는 서울보다 더럽고, 사람들이 신호등을 지키지도 않아서 무질서하고 어수선하다고 불평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 이 많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빠리는 이제는 법적으로 규제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지만 10년 전까 지만 해도 사람들이 개를 끌고 다녀서 길가에 널린 개똥 때문에 걸어다닐 때 개똥 조심은 필수 사항이었다. 또한 빠리에는 전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얼굴색이나 옷차림이 나 무엇 하나 통일된 것이 없어서 어수선하고 무질서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빠리를 다니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주는 편안함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절 대적으로 옳다는 기준이 없고,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편안함이었다. 획일적인 사회에서는 내가 올바른 법칙을 따라가야 하고, 열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하지만 여기에 서는 내가 커다란 틀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내 마음 내키는대로 해도 되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같은 날씨에서도 어떤 사람은 긴 팔을 입고, 다른 사람은 털 스웨터를 입었는데, 또 다른 사람은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다녀도 되는 곳이 빠리이다. 그 이유는 같은 날씨일지라도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과 북구에서 온 사람과 동양에서 온 사람이 서로 다르게 느끼기 때문일 것 이다. 자연히 어떤 그 날씨에 어떤 옷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자기에게 맞게 하 면 그것이 답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서 공부할 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네 생각은 어떠니?”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입장에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답 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살 아가게 배려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 프랑스의 관용의 정신의 뿌리일 게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는—지금은 그것이 달라지고 있지만—조금 모자라고, 약하고, 어리숙한 사람들도 같이 살도록 배 려해 주는 것이 많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만 인정하거나 어느 누구가 빠르게 휘몰아가려고 하지 않고, 누구나 자기 입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자기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빠리 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변해가고 있었다. 프랑스도 약삭빠르고, 민첩한 대열에 편입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힘없고 약한 것들에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프랑스에 마음이 더 갔던 것은 이번 여행에서 나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내가 10년 전과 달리 더 힘들었고, 피곤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주범은 이번 여행의 일정 때문이다. 나는 이번 여행의 초반에 프랑스의 북부에서 스페인을 거쳐서 포르투갈까지 자동차 여행을 했는 데, 그 일정은 내가 2007년에 했던 일정과 큰 차이가 없었다. 여행을 시작한 7월초부터 7월말까 지 20여 일 동안 5,000킬로미터가 넘게 운전을 했던 것이다. 뚤루즈, 포르투칼, 스페인, 보르도 등지를 돌아다녔던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일주일이나 삼, 사일 묵기도 했지만 어떤 날은 500킬 로미터나 600킬로미터를 넘게 운전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10년 전에도 비슷한 일정으로 똑같이 운전했는데도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아, 이제는 안 되겠구나!” 하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10년전 보다는 물론, 나이 자체가 절대치에서 늙었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옛날과 똑같이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십년 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었다. 10년 동안 강산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느끼는 사람도 변하기 때문에 더 변화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강산을 보는 사람 가운데 늙어가는 사람은 더 힘이 없어지고 약해지므로 그 변화는 더 짙게 다가오는 것이다. 젊을 때는 사물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왕성해서 금방 금방 대처할 수 있지만, 나이를 먹으면 같은 것을 보아도 파악이 잘 되지 않고, 반응 속도도 느려서 대처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인지도 모른다.
그런 때문인지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꿈도 많이 꾸었다. 그 가운데 어떤 꿈에서, “나는 중학생 이나 고등학생, 아니면 지금 나이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학생이었고, 문학 시간 숙제로 수 필을 써서 내야하고, 미술 시간 숙제로 그림을 그려서 내야하고, 또 다른 시간에 무슨 숙제를 내 야 했는데 내지 않아서 낙제를 할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에게 늦게라도 내면 안 되겠느냐 고 물어보려고 하였다. 늦게라도 된다면 빨리 해서 내려고 하였다.” 이 꿈은 내가 프랑스에 있는 기독교의 떼제 공동체(La Communauté de Taizé)에 간 첫날밤에 꾼 것인데, 아침에 생각하니까 참 의미 있는 꿈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학교 다닐 때 숙제를 밀린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런데 숙제를 내지 않아서 낙제를 할 판이라니!
그런데 내가 내지 못한 숙제는 수필을 쓰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과 또 하나 알지 못하는 것 이었다. 수필이라면 언젠가 내가 어떤 부탁을 받고 수필을 쓰려는데—이번 것도 분석가 에세이이 다!—도무지 딱딱한 생각만 나고, 도대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없어서 아주 답답했던 생각이 났다. 아무래도 그동안 논리적인 논문만 쓰느라고 감성이 무뎌져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러므로 수 필 숙제를 내지 않았다는 것은 “나에게 감성을 좀 더 발달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들었다. 미술 숙제라면 당연히 나에게 제일 부족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프랑스 사람들에게 제일 부러웠던 것이 크고 작은 도시 어디에나 미술관이 있었고, 그 미술 관들마다 중세, 근대, 현대 예술작품들 앞에서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았는데, 나에게 그런 부분은 아주 메말라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감정을 발달시키고 예술성을 진작시켜야 하는 것은 앞으로 평생 해야 하는 과제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머지 숙제 하나는 무엇인가? 꿈에 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 것 같았는데, 깨고 나니까 사라졌다. 그것은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꿈 에서는 한 가지였지만, 그것이 어떤 분야라면 구체적인 실천에서는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내 가 앞의 두 숙제와 더불어 평생 동안 해야 하는 숙제일 것이다. 그동안 내가 너무 게을리 했기 때 문이다. 그 꿈이 내가 떼제 공동체에 간 첫날 밤 꾼 것이라면 종교적인 것과 관련된 숙제가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종교적인 것처럼 범위가 넓은 것이라면 어디 가서 해답을 얻어야 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