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택 : 신화(神話)를 품은 인간(人間)

신화(神話)를 품은 인간(人間)

김정택(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융학파분석가)

J.T. Kim, Jungian Analjyst

올겨울에 다녀온 네팔여행에서 나는 오랜만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내면의 소리에 잠을 깨, 한밤중에 일어나 이런저런 상념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12명의 일행과 함 께 도착한 것은 1월 19일 오후였고, 이번에는 랑땅히말을 먼저 오르고 나서 포카라로 가 PHP(Pokhara Healthcare Project) 활동전반을 둘러보고 오는 계획이었다. 2001년도에 처음으로 안나푸르나히말을 밟으며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던 감격과 흥분의 40일을 보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는 데니와 젬마부부와 나, 이렇게 세 명이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에 처음으로 신고식을 한 셈이다.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있는 히말의 위용과 설산(雪山)에서 휘날리는 설운(雪雲)의 변화무상한 자태는 우리 일행을 신비로운 자연의 비밀 안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 다. 더구나 한겨울에 무턱대고 올랐던 토롱 라 에서 한꺼번에 닥친 고산증과 지독한 추위 때문에 동사(凍死)직전에 5460m의 히말라야 산봉우리 위로 밝게 떠올랐던 태양은 곧 생명 그 자체요, 우 리 일행의 목숨을 지켜준 은혜로움이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나는 밝게 떠오르는 히말의 태양 과, 오랜 세월 묵묵히 자라온 나무, 빙하에서 흘러내리는 세찬 물소리가 곧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 그리고 우리가 매일 부딪치는 삶의 질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 었다.

올해로 여덟 번째 방문한 네팔은, 도로가 새롭게 정비되고 건물들이 많이 늘어나 거리마다 활력 이 감돌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랑땅지역으로 트랙킹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잠자 리에 들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아침, 카트만두에서 공산당이 중심이 된 시위가 벌어져 우리는 그만 하루 종일 발이 묶여버렸다. 카트만두 시내의 모든 차량이 운행을 중지하고 시위대의 움직임 을 지켜보면서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하루였다. 우리 일행도 시내로 나가 빨간 깃발을 들고 시 위에 참가한 군중들 틈을 비집고 네팔 사람들이 하는 시위를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다. 그런데 네 팔의 시위는 서울에서의 시위와는 달랐다. 데모하는 사람들과 경찰들 사이에도 별 긴장이 없이 중 요한 길목을 경찰이 막고 있고, 데모대는 경찰들과 대치해서 그냥 조용히 군중의 힘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간간히 들리는 데모대의 구호가 희미하게 들려 올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좀 맥빠지게 그냥 보내고 다음 날은 떠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새 벽 3시경에 나는 갑자기 내면의 어떤 울림에 잠을 깨었다. 그 마음의 울림 끝에 내게 들려온 소 리는 바로 “신화를 품은 인간”이라는 문구였다. 뜬금 없이 “신화를 품은 인간”이라니…! 그것은 네팔 공산당의 데모 때문에 랑땅지역으로 떠나지 못하고 발이 묶였던 바로 그날 밤에 내게 주어 진 중요한 명제요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상념에 휩싸여 새벽을 맞았다. “신화를 품은 인간” 그것이 카트만두에서 내게 주어진 화두였다.

지금도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나가는 길목에서, 나는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신비스럽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해병대를 제대하면서 예수회수도원 에 입회해서 거의 평생을 수도자로 살아오면서, 지금도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내면의 여러 가지 정화되지 않은 충동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때로는 어이가 없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불쑥불쑥 치솟는 치기어린 충동들과 욕구들, 내가 거의 무력감을 느끼며 반복하는 악습들, 지나친 소심함, 때로는 자신이 너무나 미약하고 모자라 보이는 부정적인 시선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인간의 양면성을 체험한다. 이러한 나 자신이 절대자의 빛이 아니고는 이 어둠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종교가 나에게 절망에서 희망 을 길러내고, 하느님의 빛으로 마음속의 어두움을 정화하며, 새로운 힘을 얻는 구원의 그릇이라 믿고 있다. 하느님, 곧 신(神)은 분석심리학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그 의미를 결코 다 파악할 수 없는 원형적 상징과 같은 것이리라. 그런 측면에서 융은 그리스도를 자기(Self)의 상징이라 말하 지 않았을까?

“신화(神話)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이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왜냐하면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 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 그렇다면, 인간은 평생 신화를 품고 살아가면서, 이 우주와 교감하고 자연의 이치를 깨쳐나가며 서로 관계를 맺어나가는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나무 하나 풀 한포기에 생명의 본질이 들어있음을 아는 것도 바로 우 리가 영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다양한 환 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세계 어 느 나라에서 채록된 것이든 그 다양한 색깔에도 불구하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조상들이 믿고 따랐던 신화는 바로 그들의 마음 깊은 심연에서 뛰쳐나와, 생명의 창조와 삶의 본 질을 깨닫고 에너지를 얻는 원천이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도 우리 마음 깊은 심연에 ‘나만의 신화’를 품고 살아가며, 거기에서 정신적 에너지를 끌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과연 그렇다면 내가 지금껏 품고 살아오면서 정신적 에너지와 영감을 받아온 신화는 무엇일까? 내가 겪어왔던 삶의 질곡들은 내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 것일까? ‘신화를 품은 인간’이란 화두를 카트만두에서 받아든 그날부터 줄곧 내 마음에는 아직도 여러 가지 상념들이 계속되고 있다. 아무 리 생각해봐도 내가 품고 있는 신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신화’가 틀림없다. 이스라엘의 소도시인 나자렛이란 작은 고을에서 태어난 예수, 자신의 소명을 알아내기 위해 30년이란 세월동 안 자신을 성찰해온 끝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인식한 예수. 그 는 홀어머니 마리아를 뒤로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출가를 한다. 그러고 나서 먼저 제자 들을 불러 모은 후 온 이스라엘을 다니면서 ‘하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설교하면서 많은 병자 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신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 바리세이들, 율법교사 들의 시기와 질투로 흉악한 정치범으로 몰려 로마의 총독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십자가의 엄청난 고뇌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예수는 자신의 신성(神性)을 깨닫는다. 그래서 십자나무는 바로 세계수(World Tree), 즉 구원의 나무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예수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인간 구원(自己實現)의 전형(prototype)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것 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신화’의 핵심이다.

나는 지금도 내 삶의 순간순간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이루어져왔음을 믿고 있다.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인데, 그때 성당으로 나를 인도한 사람은 내 단짝 친구 였지만 그 전에 이미 무엇인가가 준비되어 온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 할머니는 큰아버님 댁에서 모시고 계셨다. 당시 큰어머님이 개신 교의 권사이셨고 광신적으로 열심인 신자이셨는데 할머니가 임종하실 때쯤에 갑자기 ‘임종대세’를 받으시고 가톨릭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님의 영정을 들고 그 당시 하나뿐이었던 포항 죽도성당에서 가톨릭 장례미사에 난생 처음으로 참여했다. 그 당시 라틴어로 진행된 가톨릭 미사와 불란서 신부님의 경건한 미사집전, 향과 성수 등이 어울려 너무나 경건했던 분위기에 압도 된 어린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어떻게 할머님이 바로 임종직전 에 ‘대세’를 받으시고 가톨릭에 귀의하셨는지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때의 기억 때문에 고등학교 때 친구의 권유를 순순히 받아드리게 했고 결국에는 교리반을 거쳐 ‘안드레아’란 세례명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동안의 내 삶의 많은 질곡과 사연들은 가히 한 권의 책 으로는 모자랄 만큼 복잡하고 다양하다. 이러한 삶의 여러 가지 질곡들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으 며, 나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걸까? 그래서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는 융의 고백이 나에게는 큰 의미를 지니고 다가온다.2) 융이 신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이야기했듯이,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하 느님’이라 바꾸어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 나는 지금도 용어의 문제보다는 삶의 진실한 체험이 훨씬 더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개인의 삶에서 인간 운명의 보편적 법칙이 개인의 의식의 목적, 예상, 의견을 방해하는 이런 모든 순간은 개성화과정의 도상에 나타나는 정거장들이다…이런 순간들은 ‘전인(全人)의 자연발생 적인 실현을 이루기 위해 통과해야하는 과정이다.”3) 이는 융이 만년에 쓴 구절이다. 융의 이 설명 은 나 자신의 삶에서 지금껏 내가 체험해온 많은 다양한 사건들,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의미도 모른 채 받아들였던 수많은 극적인 순간들이 바로 ’자기‘를 찾아나가는 개성화의 과정에서 통과해 야만 하는 정거장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내가 남은 삶을 통해 겪어나가야 할 많은 일들 또한 진정한 나 자신, 즉 자기(self)를 찾아나가는 과정임에 틀림없다. 랑땅트랙킹을 눈앞에 두고 내 마음에 울려왔던 ‘신화를 품은 인간‘이란 화두는 아마도 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에 게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올 것 같다. 그 도전은 또한 나를 살아있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때로는 넘어지게도 하면서 내 삶에 빛을 비추어 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인다: “네가 품고 있는 신화(神話)를 살아 숨쉬게 하라.” 고…..!!

jtkim@sogang.ac.kr

1) 조지프 캠벨. (2004)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민음사

2) 아니엘라 야훼. (2012)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집문당

3) 디어드리 베어. (2008) 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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