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택 :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융’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융’

金正澤

 

내가 칼 융의 심리학을 처음 만난 것은, 1976년 봄이었다. 가톨릭 신학대학을 거쳐서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한 다소 늦은 나이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대학원생 시절이었다. 그 당시에 고려대학교에는 세분의 심리학 교수님만이 계셨기에 여러 가지 다양한 강의를 듣기위해 학생들이 이 학교 저 학교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좋은 강의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덕분에 연건동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이부영 교수님의 ‘분석심리학‘ 강의를 두 학기에 걸쳐서 너무 재미있게 들었다. 아직도 젊은 나이의 심리학도에게 다가온 칼 융의 심오한 무의식 이론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 했지만, 깊은 이해라기 보다는 무언가 마음의 깊은 곳에서 부르는 희미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이 느낀 수준이었다. 특히 인류가 지닌 보편적인 심성인 집단적무의식의 원형론은 나에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달아주기에 충분했다. 그 곳은 꿈의 세계와 더불어 내가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는 한 없이 넓은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융이 이야기하고 있는 심원한 무의식의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자유로웠을 수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1980년 초에 나는 대망의 꿈을 안고 미국 유학의 길에 올라 보스톤 예수회 신학대학원에서 4년간 사목신학을 공부한 후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미국 중부 미조리주에 위치한 세인트 루이스대학교에서 상담심리학으로 학위과정을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4년을 보냈다. 잠시 황홀했던 융과의 만남을 통한 얕은 관심은 8년간의 유학생활동안 내가 치루어야 했던 여러 연학과정에 쫒겨 저만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던 셈이다. 학위과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는 또 다른 모습으로 융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심리학과 상담에 대한 다양한 관심 때문에 여러 가지 워크샾에 참석하면서 MBTI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도구가 지니고 있는 강한 힘이 바로 칼 융의 ‘심리유형론’을 이론적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이 도구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도구가 되게 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그 열매가 바로 MBTI 한국판 표준화작업으로 연결되었다. 학위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1989년부터 몇 년간은 불같은 열정으로 MBTI 를 보급하는 일에 매달린 시기였다. 이때의 융은 무의식에 관한 이론보다도 ‘심리유형론’을 통해서 인간이 지닌 서로 다른 성격적 측면을 밝혀보려고 노력한 한 정신의학자로서의 면모가 내게 새롭게 다가온 시기였다.
내가 꿈을 통한 무의식의 인도로 교육 분석을 처음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1994년 9월 28일로 기억된다. 이 사건이 나에게는 무의식의 무한한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중요한 체험이었다. 내가 학위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89년 2월이었고, 꽤 오랜 기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나에게는 많은 일거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수도원에서 ‘지원장’이란 직책이 주어졌는데, 이 직책은 수도생활에 마음을 둔 젊은이들을 여러 가지 영성 프로그램을 통해 1년간 준비시켜 예수회 수련원에 입회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서강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로서 강의를 전담해야만 했고, 동시에 서강대학교 학생생활상담연구소 소장의 보직이 주어졌다. 나는 정말로 주말도 없이 열심히 일에만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많은 일거리들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몇 년을 보냈고, 그 와중에서 나는 예수회 수도회의 작은 공동체 원장직도 겸해야만 했다. 그 당시에 나는 40대 초반의 나이인지라 에너지와 열정이 넘쳐났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보상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예수회 수도원을 위해서도 더 열심히 일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4년이란 세월이 정신없이 흘러갔고, 5년째로 접어들면서 나는 심한 탈진현상(burn-out)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무엇을 해도 신이 나지 않으면서 온 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도, 학생들과 상담을 할 때도 정신집중이 어려웠으며, 모든 것이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외적인 일들에 둘러싸여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수도자로서의 기도생활도 영적인 독서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몸과 마음의 생기가 점점 퇴락해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페르조나에 매달려 그것만이 내 삶의 전부인양 끌어안으면서 내적인격과의 단절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던 셈이었다. 모든 일에서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매사가 짜증스러워지고 있었을 때, 나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다가는 나 자신이 부서질 것 같고, 내가 아는 지식으로도 자신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게 되리라는 위기감이 깊이 엄습해 왔다. 결론은 자명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그 당시 한국예수회 지구장 신부님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나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메말라가고 있고 매사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지를 자세히 말씀드리고 그 심각성을 알려드렸다. 그 면담의 결과로 나는 학교에서 1년간 휴직을 얻어 필리핀 마닐라로 ‘제 3 수련’ 을 떠나도록 허락을 받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에서 모인 10명의 중년기에 접어든 예수회사제들이 함께 모여 영적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예수회원으로서의 소명의식을 새롭게 하는 영성쇄신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1993년 9월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제 3 수련’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이 영성쇄신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영성체험과 사목현장체험들, 그리고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체험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30일 동안의 침묵피정을 통해서 나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런데 30일 피정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 밤에 지금도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기억나는 인상적인 꿈 하나를 꾸었는데, 그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는 사람의 집으로 여겨지는 넓은 집 정원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파티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있다가 나는 혼자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층에는 빨간색 카페트가 깔려 있었고, 그곳을 지나 나는 이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쯤에 큰 창문이 있었고, 창문 밖으로는 양철지붕이 비스듬히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조그만 남자아이(4-5세경) 하나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 보았는데, 그 아이는 성장이 지체된 건강하지 못한 아이(정신지체아)처럼 느껴졌다.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 아이에게 내가 한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창문 밖으로 주었는데 그 아이가 그것을 받아서 먹으려 하다가 그만 놓쳐서 사과가 지붕 아래로 미끄러졌고 아이가 그 사과를 잡으려하다가 순식간에 지붕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이때 나는 아이가 죽었으리라고 직감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며 ‘아이가 떨어졌다’고 소리를 쳤다. 그곳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함께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함께 가다가 골목 어귀에서 아이가 나 때문에 죽거나 심하게 다쳤으리라는 예감 때문에 슬픔에 휩싸여서 골목길에 주저앉아 실망에 잠겨있었다. 잠시 후에 아이 어머니 같은 젊은 여자가 어린아이를 팔에 안고 웃으면서 걸어왔다. 나도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가서 보니까 아이는 바로 그 남자아이였고, 여전히 코를 흘리면서 내가 준 사과를 먹고 있었는데 아무데도 다치지 않고 밝게 웃고 있었다. 이때 그 젊은 여자가 나에게 아이를 건네주었다. 그 아이를 팔에 안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나는 너무 기뻐서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내 울음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꿈속에서 심하게 흐느끼다가 나 자신의 울음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꿈을 깬 후에도 그 꿈의 여운이 계속 내 안에 머물러 그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되었고, 기도 중간 중간 빈 시간이면 그 꿈이 마치 현실처럼 뚜렷하게 떠오르곤 했다. 나는 한 마디로 그 꿈에 사로잡힌 형국이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꿈이 나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 꿈은 분명히 관심과 배려의 부재로 내 버려져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지체가 된 어린아이가 내 안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부터 나는 그 동안 너무나 소홀히 했던 자신의 내면과 접촉해야만 한다는 절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아이를 다시 돌보고 키워내야만 한다는 강한 내면의 소리로 내게 다가왔다. 결국 나는 무의식이 만들어 낸 이 꿈의 인도로 마닐라에서의 ‘제 3 수련’을 마치고 돌아와, 1994년 9월부터 교육 분석을 통해 무의식과의 접촉을 시도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 꿈은 바로 나를 먼 외유에서 되돌아와 자신의 내면과의 접촉을 시도하게 만든 무의식의 작업으로 내 삶의 이정표를 뒤바꿔 자기탐색의 길로 인도한 소중한 안내자였다. 그런 면에서 이 꿈은, 의식과 무의식의 괴리로 자칫 와해되어 버릴 수도 있는 나의 의식이 내면과의 접촉을 통해 전체로 통합될 수 있는 자기발견의 길로 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기상황에 처한 나를 치유의 길로 인도한 내면의 힘이었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인생의 막바지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융은 자서전 첫머리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C.G. Jung의 回想, 꿈 그리고 思想. 17쪽) 먼 길을 돌아 다시 융을 만나고, 무의식의 인도로 교육분석을 시작한 지 5년 후에 나는 망서림과 주저 끝에 융 분석가과정에 입문하였다. 때로는 보일 듯 말 듯 한 터널의 입구를 바라다보며 자신이 선택한 이 긴 여정에 회의를 품을 때도 있지만, 꿈을 통한 무의식의 그 어마어마한 힘에 압도당할 때 마다 다시 내면으로부터 치솟는 힘을 느끼며 끙끙대면서도 이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대견스러워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라고 고백한 융의 독백이 무슨 뜻인지를 조금씩 더 깊이 체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나를 인도하고 있는 하느님의 원형적인 힘을 함께 느낀다. 언젠가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오랜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면, 어느 禪師의 말 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융’도 아니고 ‘나’도 아닌, 진정한 ‘自己’를 발견하게 되리라. 그 때가 언제일 런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글은 한국융연구원 소식지 ‘길’ 2007년도 제1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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