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 : 봄을 기다리던 어느 주말의 상념

봄을 기다리던 어느 주말의 상념

Waiting for Spring: Reflections and Recollection at Weekend House

김진숙(융학파 분석가) J.S. Kim, Jungian Analyst

 

원고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당황스러웠으나 쓰다 보면 써지겠지 하는 마음에서 수락했다. 분석가로서 나는 대체로 편안하다. 마치 있을 곳에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나 의 편안함에 일조를 하는 것은 아마도 강화도에 있는 주말 하우스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변덕스러운 날씨에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싸늘하게 느껴지지만 양지바른 곳이나 낙 엽이 쌓인 언덕에는 쑥이나 원추리와 달래 등의 산나물이 머리를 내밀고, 산수유의 꽃망울들이 막 터지고 있는 중이다. 머지않아 꽃과 초록의 향연이 펼쳐지겠지만 겨울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초록 의 싹들은 반갑기 그지없다.

뉴욕에 있을 때 주위에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이 주중에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교외 에 있는 주말 하우스에 가서 쉬기도 하고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것을 보았고, 나도 단독은 아니더 라도 동료들과 함께 공유할 주말 하우스를 가지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바 있다. 그러던 중 한 국에 오게 되었고, 바쁘게 살면서도 언젠가는 그 뜻을 이루려 했던 것 같다.

분석가 수련과정에 입문할 무렵인 2000년도 초에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한 고려산 끝자락에 위 치한 작은 농가 주택을 사게 되었다. 강화도는 그전에 가본 적도 없는 곳이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마니산 기슭에 있는 연수원에 갔을 때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때부터 시간만 있으면 강화를 가서 마음에 드는 땅을 찾으러 다녔다. 그때만 해도 길이 좋지 않아서 한번 다녀오려면 하루를 잡 아야 했다. 그렇게 해맨지 만 일 년 만에 지금의 집터를 사게 되었다.

집터는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있던 오막살이가 있던 곳이었다. 요즘은 집도 많이 들어섰지만 그 때는 황량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벌판건너 별이 떠다니다가 그곳에 정착했다는 전설이 있는 별립산과 바다건너 교동도 너머로 지는 낙조가 온 세상을 주홍색으로 물들이는 광경 은 찬란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지역이 예로부터 귀양지였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차례에 걸 친 간척사업으로 벌판인 곳이 옛날에는 해안선이어서 바닷길 외에는 도망갈 수 없는 위치였기 때 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동네의 별칭이기도 한 피납골은 강화도로 천도했던 고려왕실의 최후의 피난처였다는 설과, 피난했던 이들의 피로 물들었다고 해서 생겼다는 두 가지의 전설이 있다고 한 다. 내가 느꼈던 황량함과 낙조의 찬란함을 그들도 느꼈을 것이다.

수련과정을 마무리하면서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올해가 입주하고 세 번째 맞이하는 봄이다. 상 주하지 않고 주말에만 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제 자리에 놓이는 것에는 많은 시간을 요했다. 이것 하면 저것 하고 싶고, 저것하면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아마 집을 지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통나무 오두막을 지을 예정이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서 규모도 커지고 형태도 많이 달라졌다. 그러느라 몇 주면 완공된다고 했던 공사가 몇 년이 걸렸다. 무지하게 고생 은 했지만 모두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었던 것 같아서 지금은 나쁘지 않다.

입주하고 삼년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집 모양을 갖추게 되고 살림도구들이 어느 정도 제 자 리를 찾게 되면서부터 그동안 방치해 놓았던 정원과 조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정원과 집 옆구리에는 고려산 자락이기도 한 야산이 있는데 입주했을 당시 방치해 놓은 잡목에 칡넝쿨을 비롯하여 온갖 잡초 넝쿨들이 얽혀있어서 가히 원시림을 방불케 하였다. 그동안 대충 잡 목을 베어내고 나름대로 정리를 했는데도 작은 무덤 같은 형태의 잡초 넝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띠었다. 그래서 언젠가 그것을 걷어내고 거기에 돼지감자, 맥문 동 같은 구근 식물을 키워서 꽃도 보고 열매나 뿌리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드디어 지난 주말에 그 작업을 실행하기로 하고 구근이 든 봉지와 호미자루를 들고 언덕에 올라 갔다. 그냥 슬슬 걷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마스크나 두꺼운 장갑도 착용하지 않고 시작했는 데 잡초 넝쿨더미 속에 가시가 있는 무엇이 있고 그것이 잡초넝쿨과 뒤엉켜있다는 것을 여기저 기 찔림을 당한 후에 알게 되었다. 그 속에는 해묵은 찔레넝쿨이 웅크리고 있었고 그것이 잡초넝 쿨에 가려서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잡초 넝쿨을 걷어내자 모습을 드러낸 찔레꽃은 잡초 넝쿨의 압력으로 가지들이 둥글게 휘어졌지만 생생한 초록색으로 생생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 다.

찔레꽃이라 하면 생각나는 것은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친척집 가는 길에는 찔레꽃이 많이 피 었고 어른들의 이야기가 찔레꽃 필 때 비가 세 번 오면 풍년든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과연 그런 지는 알 길이 없지만 척박한 땅을 오로지 하늘에서 오는 비에 의지했던 그 시절 그 지역 농부들 이 오랜 삶의 경험 속에서 터득한 것일 것이다.

해묵은 잡초 넝쿨을 호미로 당길 때 마다 켜켜이 쌓인 먼지와 잡초의 씨앗들이 뒤섞인 황토색 먼지가 피어올랐는데 한나절을 그렇게 장비도 없이 어설픈 모습으로 걷어내고 나니 갑자기 머리 가 욱신거리고 눈이 따가웠다. 감기 든 적이 없이 겨울을 보냈는데 익숙하지 않은 험한 일을 한 후유증을 톡톡히 앓았다. 다음날 그 언덕에서 따온 원추리의 싹들을 데쳐서 새콤달콤한 초장에 묻 혀서 먹으니 그야 말로 꿀맛이었고 그래서 여기저기 아프던 것도 사라진 듯하다.

잡초 넝쿨에 짓눌려 둥글어진 찔레꽃 넝쿨을 보면서 이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지금은 먼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지인이 이곳을 그리워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곳에는 돌이 많아서 돌 고개라 했는데 찔레꽃이 많았고 우물물이 맛있었다는 것이다. 돌은 많아서 축대를 거기서 주운 돌로 했고 오래된 우물 자리에 판 지하수의 맛도 최상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찔레꽃 은 어디 있나 했는데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새삼스러이 오래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 들과 연대감을 가지게 된다.

이 지역은 고인돌 군락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멀지 않는 곳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 인돌 박물관이 있다. 집을 지으려고 흙을 파내고 거기서 나온 돌로 축대를 쌓을 때 퇴색되고 삭아빠진 조개껍질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중요하다 싶어서 따로 모으다가 너무 많아서 포기했던 적 이 있다. 그러니 몇 십 년 전만이 아닌 훨씬 그 전 이곳에 옹기종기 모여서 조개를 까먹고 살았을 고대인들도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이곳으로 피난했다가 피를 뿌리고 죽어간 이들이나 한을 품고 볼모로 끌려간 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지인이 덧붙인 것은 그 언덕에는 맛있는 것을 마련해 놓고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던 할 머니가 있었다는 것이다. 혼자서 적적하게 지내다가 눈매가 초롱초롱한 어린 소년이 놀러 오면 반 가웠으리라. 그 할머니가 내 집터에 살다가 돌아가셨다는 할머니와 같은 할머니인지 아닌지 모르 고 또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저 이렇게 서로 엮여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곳은 분명 오랜 세월 여러 곳을 헤매다가 도착한 곳이다. 30년 전 뉴욕에서 분석을 시작했을 때 꾸었던 첫 꿈에서 일주문을 지나 거대한 사찰로 들어갔고….거기에 머물지 않고 홀로 뒷산 암 자로 가는 꿈을 꾼 이후 수많은 곳을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헤매며 돌아다니다가 30년 만에 도 달한 곳이다. 지금의 집이 한국식의 암자의 형태는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암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암자의 주인인 내가 이곳에 살았던 할머니(들)와 같이 이제는 할머니라고 불려도 좋을 모습으로 이곳을 가꾸면서 대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감사한 마음으로 다가온다.

해묵은 잡초넝쿨 속에 갇혀있었던 찔레나무를 해방시킨다는 것은 마치 원질료 속에 갇힌 영혼 을 구원한다는 연금술사들의 작업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틈틈이 번역하고 있는 연금 술 관련 서적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찔레꽃 가지들이 아직은 가녀린 연녹색의 잎사귀에 수줍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곧 풍성해질 것이다. 그리고 꽃도 피고 은은한 향기도 피워주고, 그리고 그 때에 맞추어서 비도 세 번 정도 와 주고 그래서 풍년이 되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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