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섭 : 직면, 기여, 소통 그리고 자비심

<Council of Societies meeting in Zurich 참가기>

직면, 기여, 소통 그리고 자비심
Confrontation, Contribution and Communication and Compassion

이보섭

한국 융 분석가 협회 (KAJA) 에 새롭고 신선한 에너지가 필요하고, 내가 그 에너지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나의 방식에 따르면 이런 제안은 곧바로 No! 한다.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을 추가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Yes! 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길 원고나 발표, 원고제출을 부탁받았을 때 거절해왔지만 이 글을 부탁받았을 때 곧 수락하였다. 이제까지 No 하던 일에 Yes라고 말하면 삶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나의 삶이 이제 어떻게 달라질까? 무엇보다 내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그대로 필요로 하니 그냥 나 그 자신이면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 제안, 나의 스타일이 필요하다는 제안은 내게 참 신선하고 감동적이면서도 동시에 난감하게 느껴졌다. 감동적인 이유는 나의 스타일이 한국의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1985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듯이, 2001년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돌아온 것을 후회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차츰 밖의 세상을 등지는 방향으로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급속도로 변화했지만, 놀랍게도 전혀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내게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 놀라는 나를 세상은 신기하게 바라본다. 융이 “개성화는 세상을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포함시킨다.” 라고 말했지만, 한국 스타일은 나의 삶에서 세상을 제외시키고 싶을 만큼 상처와 실망을 안겨주어서 외면하고 단절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사람을 불필요하게 매우 피곤하게 하는 곳이다. 그래서 개성화를 위해 최소한으로 세상을 나의 삶에 포함시키고, 나의 스타일이 어울리는 곳인 유럽으로 가거나 간단히 세상을 떠나는 방법으로서 명상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세상일에 더욱 관심이 적어지고, 명상을 하면서 펼쳐지는 내면의 세계가 나의 관심을 강하게 끌기 시작하였다. 초기불교, 소승 불교계통의 명상 시작 단계여서 그랬던 것 같다. 스승의 강력한 권유로 몇 년간 출가해서 명상하기로 하고 적절한 시기를 살펴보는 중이다. 이것이 곧 위에 말한 난감한 이유이다.

명상의 길과 회장의 길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은 바로 한국 융 분석가 협회 회장이 됨과 동시에 주어진 첫 임무에서 아주 구체적인 충돌로 나타났다. 2월 취리히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는 것이다. 이 회의는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제 분석심리학회 (IAAP) 개최 6개월 전에 있는 각 나라 대표단의 사전 모임이다. 그런데 일 년 전부터 기대했던 히말라야등반 일정이 연기되면서 딱 회의 일정과 겹쳐져 버리고 말았다. 히말라야에 가면 나의 명상스승이 계시는 곳에서 한 달간 명상을 계속할 계획도 세우며 히말라야 행을 택하고 북한산 예비등반까지 마치고 모든 수속을 밟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취리히로 가야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회장이 해야 할 중요한 임무이고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임자라는 것도 회장직 제안 안에 살짝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결정을 즉시 해야 할 때 명상을 하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명상을 시작했는데, 이때 달라이 라마의 모습이 보였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그에게 받은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는 수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명상의 길과 세상의 길의 충돌에 관한 질문을 그에게 하였었다. 그의 대답은 이 둘이 분명히 하나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이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승려이면서도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세상 각처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대화한다. 수천 명 청중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 집중된 유럽의 한 법문장소에서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내가 여러분보다 무엇인가 많이 알아서 가르침을 주러 왔다면, 나는 이곳에서 긴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여러분과 대화를 하러 왔기 때문에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당하고 있는 정치적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자비심이 샘솟고 따뜻한 유머와 함께 지혜가 넘쳤다. 그리고 그 공간에 앉아있는 동안 내내 나는 편안하고 고요한 행복 그 자체였다.

그래, 세상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실망하고 외면하고 경멸하고 단절하는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희망을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직면하고 소통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자비심과 지혜를 기르는 명상 수련의 길로서 회장의 길을 가자. 제대로 가장 깊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 사람은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서 아무 걸림이 없을 것이다. 걸림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진정한 명상의 주제가 되어 수련을 더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건에 구애되지 않는 진정한 자유란 한국 스타일이 좋다 나쁘다, 내게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다의 분별심이 없을 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유럽에서 15년 생활 끝에 한국에 돌아간다는 일은 당시 모든 동료들이 커다란 용기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이 가능할까 걱정해 주었다. 나도 오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지만 분석가 선생님은 가서 한국인들을 분석하는 일을 통해 한국의 혼을 구원해야, 혹은 해방 (erlösen)시켜야한다고 하시면서, 분석가를 필요로 했던 당시 창립된 지 얼마 안 되었던 한국 융 연구원과 연결해 주셨다. 또 하나의 외국에 온다는 느낌으로 당시 왔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의 혼을 해방을 시키는 것 같던 신바람나던 잠깐 시절 이후, 한국 스타일에 숨통이 막혀가는 나의 숨길을 겨우 겨우 열면서 은둔에 가까운 길을 간 것 같다. 보통 나는 외국에서 적응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왜 다시 온 한국에서는 적응이 어려운가? 아마도 마음이 없어지게 만든 사건들 때문일 것이다. 사실, 상처 주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에게 주고 있는지 모른다. 알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하지 못한 것은 나의 소통능력의 한계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나 자신의 책임이다.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두 번 빼앗기는 결과가 된다. 자비심과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라도 나를 더 크게 열어 진심으로 직면해 보자. 그동안 나의 숨길을 여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한국의 전통 국악과 춤과 국선도의 치유력에 대한 감사를 나의 방식으로 계속 세상에 전달하자. 그것이 나의 한국 스타일이다! 내가 한국인인 이상 한국 스타일이 나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이번 스위스 여행길은 이렇게 떠나기 전부터 내게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회의를 싫어하는 내가 회의 참가를 위해 먼 여행을, 그것도 내가 가장 원하던 다른 여행을 포기하면서 까지 떠나게 되니 마음을 굳게 다지지 않으면 무의미한 낭비여행이 될 것 같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혹은 내향형 인간이 외향으로 갈 때 하게 되는, 외향형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심각한 마음의 준비운동일 수 있다. 융심리학 공부를 하기위해 스위스로 간 것으로는 처음이었던 1993년 2월 취리히는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이고, 푸른 하늘의 겨울 태양이 찬란하게 그 위를 비추고 있어서 연구소 근처의 숲속을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하루 종일 걸었었다. 꼭 20년이 지난 이번 겨울에도 도착한 첫날밤 내내 함박눈이 내리더니 새벽에 아인지들렌 대성당으로 향하는 새벽길은 마치 중세의 한 순간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 중국에서 선물 받은 화사하게 수가 놓인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던 대성당안의 블랙 마돈나 앞에 앉아서 지난 20년을 아주 천천히 깊게 돌아보았다. 그리고 성당 뒤의 눈 숲속을 온종일 걸었다.

취리히에서 찾아간 회의장의 정원에 역시 눈이 소복이 내려있어서 반가웠다. 첫 날 저녁 환영 모임에서 세계 각국에서 도착한 참가자들이 모두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언제 어디서 융 연구소를 수료했었는지 수련시기의 이야기와 그 이후의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86년부터 독일 철학과 재학 중에 우연히 접하게 된 융의 서적은 전공서적 외에 휴식시간 동안 즐겁고 편안하게 읽을 거리였다. 책을 펼치면 융이 반가이 맞이해 주고 그와의 대화는 나의 독일에서의 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다 7년 넘게 거의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서양의 남성들, 특히 독일 남성들이 쓴 철학책을 읽으면서 보내다가, 결국 내가 독일 남성인 것같이 느끼고 이미 그렇게 사고하고 있는 위기상황에서 스위스 융 연구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스위스 융 연구소 인터뷰에서 지원하는 이유를 질문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되기 위해서 독일에 철학하러 왔다. 융의 저서를 읽으면서 융이 내담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그가 현대의 소크라테스 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가 유럽을 밖에서 보고 싶어 했고 동양에 관심을 가졌는데, 나는 한국을 밖에서 보고 싶어서 유럽에 왔다. 이렇게 자신이 속한 세계 너머에 관심이 있는 나와 혼이 연결된 사람(Seelenverwandtschaft, Kindred Spirit)들을 찾아왔고, 집단무의식으로 통하는 것을 체험하는 그들과 맘껏 교류하는 것은 매우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을 할 때의 느낌이 20년이 지난 이날 다시 강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스위스에서 융 공부를 통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영혼의 뿌리를 찾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외국에서 오셨나요?”라는 말을 들으면서 부적응 상태이지만, 한국인 대표로 세계 각국 대표들이 모인 국제회의에 가게 된 것이다. 나의 영혼을 구하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의 삶을 흥미롭게 꾸며주고 있는 융에게 감사하며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보답하여야겠다는 마음을 뜨겁게 느끼며, 정원의 눈 덮인 분수 주변을 맴돌며 거닐었다.

다음날 아침 시작된 회의에서 회장의 첫마디는 나를 무척 기쁘게 놀라게 했다. 국제 분석심리학회에 대해서 불평하고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소통하고 변화시키면서 함께 발전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한국에서부터 계속 생각하던 내용이었고 한국 융 분석가협회에 거리를 두려는 분에게 드렸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국제 분석심리학회가 내게 아주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대표단을 파견할 수 없는 나라를 위해 토론을 화상채팅의 형식으로 개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들은 회의 시간 내내 하향 소통이 아니라 상향 소통을 위해 조심하였다. 대표단이 각 나라에 가서 보고하는 것조차도 하향 소통이므로, 각 나라회원 모두가 국제 분석심리학회 홈페이지(www.iaap.org) 에 들어가서 토론의 내용을 보고 서슴지 말고 의견을 메일로 직접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주요 토론 내용은 국제 분석심리학회가 아직 융 분석가 수련기관이 없는 나라에 교육인력을 파견하고 있는 일에 대한 찬반 의견이었다. 그곳 정원에 테이블 위에도 소복에 쌓였던 눈만큼 많은 이야기를 이 글에서 다 풀어내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혼과 관련된 다른 여러 영역에도 해당이 되지만, 융 심리학의 진수는 대학이나 대형 학회 같은 곳에서 전달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융의 직계 제자들이 그 진수의 여러 다른 측면을 이해했을 것이다. 내가 스위스에서 수련 받던 중 최후의 생존 인물인 폰 프란쯔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대부분의 스위스 융 연구소의 분석가들은 그녀와 공부했던 분들이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그녀에 대한 관계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갈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그들 모두에서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어서 지금까지도 나의 문제는 아니다.

자신이 융을 더 많이 이해한다고 믿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을 빈정거리거나 심지어 증오하는 사람도 있다. 융심리학에서 이해한 내용을 제대로 살지 않거나, 융심리학 관련 일로 남에게 상처를 주며 폐인지경으로까지 만들어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실 자체도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게 완전한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 그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의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길은 옳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면서 그 길을 가지 않는 길표시판 같은 사람도 최소한 표시판 기능은 하고 있다. 융 분석가들이 실망을 안겨줄 때는 그들의 모습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곳을 바라보아야한다. 그 곳은 권력이 아니라 에로스이며, 분열이 아니라 융합이며, 무엇은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성이다.

융은 어떤 한 인물의 사상이나 어떤 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다. 현상학적 방법을 택했던 만큼, 모든 것을 열어놓고, 같은 것도 항상 새롭게 다시 보았다. 그는 자신의 심리학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융은 “나는 융 학파가 두렵다” 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의 사후 발간된 그의 일기장 <레드북>이 보여주듯이 자신을 치유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십여 년간 시도하여 성공한 자신을 치유한 방법을 체계화하여 나아간 것이 그의 심리학이다. 레드북 안에 융 전집이 모두 이미 들어있었던 것을 보고 나는 너무 놀랐다. 그래서 그의 전집을 읽는 동안 내내 이것은 머리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혼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구나! 융은 자신의 일기장의 내용을 학문적인 용어로 바꾸어 새로운 심리학을 창조하고, 자신을 치유한 치유법으로 다른 인간을 치유하는데 기여하였다.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다른 학문, 문화, 종교하고 소통하였다. 융은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워서 글을 쓴다고 하기도 했다. 언젠가 미래에 자신을 이해할 사람을 위하여 쓴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그는 심지어 나중에라도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기대심에 살았으니 소통이 매우 필요했던 사람 같다. 그가 살던 동네에 그를 직접 알았던 사람들의 자손들을 우연히 만나 하게 된 대화를 통해서도 그는 겸손하고, 따뜻한 유머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 지혜가 충만했던 사람이었다.

이 번 스위스 여행은 매번 스위스 여행이 그렇듯이 내 인생에 방향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융에게 도움을 받은 감사의 마음으로, 그가 소통하고자 한 그의 미래인들 중 하나로서 그를 이해한 책임을 지고, 나의 미래인들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연구해 보자. 그가 자신과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직면했듯이, 나도 나 자신과 나의 현재, 나의 미래를 보다 철저히 직면하자. 그래서 계속 나 자신으로 거듭나자. 이 일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혜와 자비심을 명상을 통해 키우자.

국제 분석심리학회는 동양의 참여를 진지하게 환영한다. 이번 모임에서 일본인 대표가 2016년 국제 분석심리학회를 쿄토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 발표하였다. 오스트리아도 비엔나에서 학회를 유치하기 원하기 때문에, 2013년 8월에 코펜하겐에서 개최되는 국제학회 때 표결하게 된다. 만일 일본에서 개최하게 되면 동양에서는 최초로 열리는 국제 분석심리학회가 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보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회의장의 열띤 토론 사이사이 쉬는 시간에, 나는 호텔방에서 열심히 국선도를 하면서 머리로 모인 기운을 온몸으로 분산시키면서 2박 3일의 마라톤 모임을 무사히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러면서 2016년 학회 때 국선도에 대해서 발표하기로 결심하였다. 2013년 6월에 융이 설립한 스위스 융 연구소의 모태가 된 단체에서 이미 국선도에 대해서 발표하기로 되어있다. 나는 그곳에 스위스와 독일에 있는 동료들을 초대하자 기뻐하며 오겠다고 한다. 나는 원래 국제 분석심리학회에는 취리히 연구원 시절 마침 취리히에서 개최되었던 1990년대 학회에 가서 몇몇 강의를 들은 적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이 너무 갑갑하던 지난 해, 마감일도 지났을 때, 2013년 코펜하겐 학회를 위해 엉성한 제안서를 급히 보내고 기대도 안했는데 발표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아 기뻤다. 만나고, 소통하고, 새롭게 보고 듣자.
갑자기 유럽에서 파내어 한국으로 옮겨 심어 꽂아 고생하고 있는 나의 영혼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유럽을 돌려주어야한다. 나의 영혼의 균형에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세월이 갈수록 더 실감한다. 국제 분석심리학회를 새로운 차원에서 만날 수 있어서 기쁘고, 그 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서 기쁘고, 선뜻 자신들의 나라로 초대해주어 기쁘고, 내가 변화의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느껴서, 적극 밀어줄 테니 학회 임원으로 출마하고, 같이 여러 가지 일을 하자며 나를 적극적으로 포함시켜주려는 그들이 반갑다.

행복감에 젖어 아무도 없는 정원의 테이블 위에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그리고 혼자 미소 지었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장시간 여행을 마다않고 모여 앉아 쉴 새 없이 열심히 소통하는 그들의 모습이 그냥 사랑스러웠다. 은둔의 삶도 아름답지만, 그 모습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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