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혁 : 융과 나

융과 나

徐東赫(본원전문과정 상임연구원, 가천의대 신경정신과교수)

‘융과 나’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내 마음의 첫 반응은 ‘융은 융이고 나는 나이다.’ 하는 생각이었다.
전에도 융의 저서나 융에 관한 책들을 보며 이러한 생각이 가끔 들었었다. 그의 삶은 아주 ‘유니크(unique)’하다는 느낌을 준다. 외래어를 쓰고 싶지 않지만 더 이상 적절한 우리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아마 이것이 개성화과정을 가고 있는 사람의 삶이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집단 무의식과 집단의식에 의하여 본능적이고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유니크하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융의 삶은 흉내를 낼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다. 그는 그 만의 삶을 사는 것이고 나는 나만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의대 본과 학교 축제 때 이부영 선생님이 의대불교학생회에서 주최한 강연을 하시는 것을 듣고 분석심리학을 접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상당히 깊이가 있는 학문이라고 느끼고 끌렸던 듯하다. 본과 3학년 때 나의 생일에 형이 선물로 분석심리학(이부영 저) 책을 사주어서 읽었고 무의식의 탐구를 통하여 인격의 성숙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 나의 내면의 바램과 부합하였다. 각자 자신의 개성에 따라 다른 바램을 가지게 된다. 나의 내향적 성격, 불교적 가치관, 지속적인 내적 성장을 하고자 하는 바램과 분석심리학은 잘 부합되었다. 이것이 내가 분석심리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이다.
정신과 전공의 2년차 때부터 분석을 받으며 분석심리학은 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 자신과 인간을 좀 더 깊이 이해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았고 남의 꿈을 들으면 알지도 못하면서 해석을 하려드는 경향이 생기었다. 분석심리학은 나의 정신과 의사로의 자아상을 형성하는데 중심이었다. 융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융의 경지는 얼마나 되는지를 불교적 가치관에서 가늠해보기도 하곤 하였고 분석심리학을 공부하면 나도 융처럼 깊이 있는 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랜 동안 융을 이해하고 닮고자 하는 바램이 있어 왔다. 인격의 발달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이상화, 동일시와 모방은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이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융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산 사람이다. 융에게서 배울 것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이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전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융이 자신의 학설을 따르는 연구소를 만들지 않으려 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삶 속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상을 만나게 된다. 융은 자신의 학설이 그 중의 하나로 이해되기를 바랬지 추종자들이 생기고 그것이 배타적으로 옳다고 주장되며 도그마로 고정되기를 원치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끊임없이 방황한다. 무언가 안정이 되는 듯하면 여지없이 어떤 일이 생기어 나를 뒤흔들어 놓고 한다. 고통과 갈등은 나를 깨우고 내적 성찰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고통과 갈등을 견디고 내면을 들어다보면 언젠가 답이 떠오르게 된다. 물론 이 답이 궁극적인 답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험을 통하여 무의식에는 자아의식보다 지혜로운 大人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융을 통하여 무의식을 성찰하고 대화하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깊은 지혜를 믿고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은 나의 인생에서 소중한 경험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내가 더 유식해지는 것 같지도 않고 인격적으로 성숙하는 것 같지도 않다. 문제는 갈수록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도 새로운 지식습득에 대한 욕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남을 탓하는 것은 줄어들었다. 이것도 성숙이라면 성숙이라고 자위를 하고 道를 닦으면 나날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를 되새기기도 한다. 그래도 현재 나의 모습은 10여년 전에 꿈꾸던 깊이 있는 현자의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대극적인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집단 무의식과 원형, 자아의식과 자기 등은 중요한 통찰이다. 그러나 상징적인 이해를 통한 개성화 과정이란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러한 욕구는 성격유형과 관계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외향적인 사람이 열심히 일하여 주변 사람들을 돕고 돈을 벌어 세금도 많이 내고 하였다면 그는 자아 중심성에서 벗어난 훌륭한 삶을 산 것이다. 그가 무엇을 외부에 투사하고 상징을 외적 실체로 경험하고 살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일부의 내향적인 사람들이 할 일이다.
분석심리학적으로 이해할 때 깊이 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더 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다만 고통이 소모적인 고통에 머물지 않고 의미의 이해를 통해 창조적인 고통으로 변하는 것이다. 대극의 갈등은 지속적으로 생기며 그에 따른 대극의 합일의 경험도 반복될 것이다. 성숙이란 갈등을 회피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의미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짐을 말한다. 과거 나의 바램은 갈등이 없는 평온함에 이르는 것이었으나 그것이 헛된 바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나의 바램과 비슷한 바램을 가지고 분석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나의 경험에 따른 나의 개인적 이해이다. 이것이 얼마나 보편적인 경험인지는 알 수 없다. 나와 타인의 정신이 공유하는 부분만큼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융은 융이고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융은 나이고 나는 융이다. 내가 융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나의 생각, 나의 경험은 지금의 나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역사적인 융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다른 경로를 통하여서라도 내 마음의 大人을 만났을 것이다.
내가 나의 삶을 살아가는데 융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해하게된 정신의 대극의 문제와 그에 따른 초월과 상징적 태도는 소중한 정신적인 자산이라고 생각된다.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지적 이해에 머무는 나의 통찰이 심화되기를 바라며 우리 분석심리학회 구성원들이 이러한 지속적인 작업이 진행되도록 서로 도울 수 있는 좋은 道伴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 글은 2000년도 한국융연구원 소식지 ‘길’ 제1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in 에세이.